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것 외엔 방학식 하는 날에 특별한 일은 없다. 방학하는 날만이라도 조금 자유를 더 누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지난번에 세종시에 서류 접수하러 간 날에 딸과 모험 같은 1박 2일 여행(?)을 했으므로 오늘 약속은 자동 취소. 지난 금요일에 치렀을 독서 인증 시험을 내일 본다니 이제 딸의 일과에 끼어들 틈이 없다.
점심 먹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한 학기 평가회를 하면서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카페인이 갑자기 충전되니 머리가 통통 튄다.
마침 같은 사무실에 동료가 안동 부모님 댁까지 이 날씨에 버스를 여러 번 환승해서 간다는 말을 듣고 대구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직장이 있는 동네는 대중교통편이 시원치 않아서 자취하는 곳에서 터미널까지 빗속에 가방 끌고 우산 쓰고 걸어야 할 것이고, 대구에 도착하면 서부 터미널에서 동대구까지 이동하면서 또 비를 맞고, 동대구 환승센터에서 시간 맞춰서 기다리다가 본가에 가는 버스를 타고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까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핑 돈다.
이 빗길에 무슨 약발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벌이고는 긴장해서 어깨가 뭉쳤다. 동대구 환승센터는 백화점과 연결되어 있어서 백화점에 주차하고 동료를 배웅한 뒤에 혼자 짜장면을 먹었다.
도삭면에 볶은 짜장을 올린 면인데 어쩐지 탄수화물이라도 잔뜩 먹어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의 집 귀한 딸, 빗길에 위험할지도 모를 작은 차에 태우고 가다가 살짝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왜 나는 꼭 그러고 싶었는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마땅한 물건은 없고 내가 함께 근무하는 동안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 같은 거였다. 몇해 전에 어떤 선생님께서 차 없는 나를 태우고 중간에 들러서 내 딸까지 태워서 집에 데려다주신 적이 있다.
산청에 근무할 때 여러 선생님께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동네에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은 대중교통으로는 그렇게 몇 번이나 환승해야 갈 수 있어서 번잡하고 실제 거리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대가 없는 친절도 수없이 받았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친절을 오늘 그렇게 겨우 한 번 갚았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유지되는 거다.
저녁을 넉넉하게 먹고 무사히 고속도로를 탔지만, 지난 주말에 충청도를 지나면서 폭우를 만난 것처럼 오늘은 경북 지역에서 폭우를 만났다.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대구 가는 길에 샀던 휴게소표 호두과자를 한 봉지 먹어치웠다.
처음 보는 휴게소 차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기를 쓴다. 쉬어야 더 갈 수 있는데 빗길에 밤운전까지 온몸이 너무 긴장해서 뇌로 가는 혈관이 얼어붙은 듯 차갑고 어지럽다. 글을 쓰면 좀 편안해질까 싶다.
이대로 차 안에서 잠들어도 좋겠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내며 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박자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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