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큰 회한은 없다. 자잘한 후회야 항상 따르는 법이고, 미룬 청소는 내일 지구가 망한다면 딱히 문제 될 것 없다. 오늘 딸과 통화해서 안부를 물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내일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꽤 시간이 걸릴 예정이니 오히려 살아내야 할 하루하루가 힘겨울 수 있다는 각오가 필요할 뿐이다. 그 순간순간 내가 해야 할 일 - 내가 할 수 있는 일 - 해서는 안 되는 일 : 이 정도 가려서 하는 것 이상의 뭔가를 할 의지도 계획도 없는 오늘을 산다. 이 상태는 차분한 것인지, 우울한 것인지, 평상심인지 알 수 없다. 닥치지 않은 극단의 상황은 내게 위협이 아니다. 넘고 있는 순간만 힘들지.
헤나 염색하고 4시간 버티기 하느라 머리 좀 아팠다. 염색의 차원보다는 아무런 관리도 하지 않는 몸뚱이 중에 길어 나오면 자르기만 하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니까 늙어 보일까 봐 딸이 신경 쓴다. 제 어미가 초라하게 늙지 않기를 바라는 딸의 기대에 일부러 어긋나지 않는 노력 정도. 출근할 일 없어지면 이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자식보다 어린아이들 속에 생각도 외모도 너무 차이 나서 대하기 불편할까 봐 신경 쓴다. 나도 옛날에 수업 시간에 어느 선생님의 흰머리카락에 갑자기 시선이 꽂혀서 한동안 내내 그것만 눈에 띄어서 불편했던 적 있다. 사춘기엔 정말 어이없이 이상한 것에 신경이 쏠리기도 하니까.
그나마 이런 사회적 반응조차 하지 않으면 나는 점점 나를 내버려 두다가 조용히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서도 부모의 존재가 어떤 힘이 되는지..... 내게는 없는 경험을 딸에게는 만들어줘야 하니까.
*
무척 감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무 감정 없는 것 같은 게 나다. 무식할 정도로 무심한. 공감능력 과다로 피곤한 것보다 이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