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에 파리 라발레 아웃렛에서 산 흰색 벨트를 내내 잘 쓰다가 오늘 버렸다.
2013년, 그해 봄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숨만 한 번 내쉬면 그대로 땅으로 꺼져 들어가서 폭 고꾸라져서 그대로 죽을 것만 같던 정신적 고통과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딸과 함께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먼 길을 떠났다. 12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파리 공항에 내려서 숙소에 짐을 풀고 낯선 거리를 걷고, 다음날 시차 적응 삼아 낮에 파리 외곽에 있는 아웃렛에 갔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격이 싼 랄프** 매장에서 스웨터, 벨트 등을 샀다. 그때 산 스웨터는 스위스 체르마트에 갔을 때 고르너그라트 역 주변이 너무 추워서 껴입고 유용하게 썼고, 이후엔 살이 쪄서 거의 입지 못하고 모셔뒀다. 벨트는 10년 넘게 아주 야무지게 잘 썼다. 한참 전에 버렸어도 될 물건이었는데 여행지에서 산 물건이어서 나름 애착이 있었다. 깔끔하고 괜찮은 물건을 싼 값에 잘 사서 기분 좋게 오래 썼다.
익숙해진 것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쉽게 놓지 못하고 한참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내가 저버리지 않아도 인연이 다하면 절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인연이고, 수명이 다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게 물건이다. 그 자리를 대체할 물건은 비슷한 듯 새로운 것으로 사들일 수 있다. 인연도 그러할까?
빈자리에 누군가 들어오면 빈자리만큼 찰까, 그보다 꽉 찰까...... 지나친 인연을 돌아보게 될까......
한 번 놓은 인연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울 만큼 아쉬운 인연은 없었다. 깊이 정들 새도 없이 가볍게 스쳐간 분분한 바람을 두고 인연이라 일컫지는 않으니 딱히 인연이 있었다고 할만한 이도 없다. 얽히고설키는 인연 없이 가볍게 살고자 작정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인연 없이 세월만 흘러갈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나는 끝내 곁을 채울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나란히 바라보며 갈 수 있는 인연이...... 입맛대로 어디 있겠냐만 자꾸만 두리번거리게 되는 건 아직 그 욕심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1997년 온라인에서 나를 발견하고 사무실에 곱게 핀 양란을 쓰다듬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던 사람이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라도 살아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내서 다시 만나고 싶었을 만큼 그 시절 첫정 든 인연에 대한 집착도 컸다. 그 집착을 놓아야 하는 일이 너무도 무겁고 어려워서 나를 굶겨죽일 작정으로 열흘이상 곡기를 스스로 끊고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런 고통 없이도 나를 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때 경험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지 않은 게 간혹 아쉽다. 곳곳에 존재하는 많은 스승들 덕분에 새롭게 깨치고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글로 옮겨서 전하는 분들의 노고와 공덕에 또한 감사하다. 잊힌 줄 알았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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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청소를 하다가 벨트 하나 집어 들어서 오늘에야 버리고 간단한 메모를 남기려고 노트북을 켰다가 생각만으로 먼 길을 한순간 훑었다. 몸이 좀 나아져서 머리가 맑아졌는지, 머리가 맑아져서 몸이 좀 나은 듯한 착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원하는 곳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도화선이 되는 작은 시작,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