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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9.29

by 자 작 나 무 2023. 10. 7.

2023년 9월 29일

 

 

전신통, 미열 기타 등등에 시달리며 자리보전하고 누워있었는데 친구가 고기 재워놓은 거 자기 집에 와서 꼭 가져가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실 그 친구가 나물 한 그릇 담고 전 부친 거 담아서 갖다 주러 우리 집까지 왔는데 고기 담은 통에 고기는 없고 양념장 부어놓은 것만 있었다. 아이스박스에 얌전하게 담아 온 통엔 아이팩과 양념간장만 찰랑찰랑 든 통이 들어있었던 거다.

 

 

 

 

 

그 집 둘째 딸이 이런 실수를 알게 되면 엄청 놀리겠다며 길에서 웃고 황당한 실수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내 딸이 보고는 내 또래가 전반적으로 겪는 증상이라며 싱긋이 웃었다. 시댁에 돌아갔다가 집에 오후에 돌아가니까 그때 꼭 들르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하고,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오려고 전화를 했는데 내가 그 전화를 놓쳤다.

 

우리 모녀를 불러서 고기 구워주려고 했는데, 다음날 그 댁 식구들이 어르신들 모시고 가족 여행을 떠나게 돼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며 그 고기를 꼭 가져가서 먹으라는 거다. 추석 전날에도 몸이 그다지 좋진 않았는데 추석 당일엔 해열진통제를 몇 개나 먹어도 그날은 힘들었다. 딸이 얼음주머니에 수건을 둘러서 가져다줘서 그걸 온몸 여기저기에 한참 대고 있었다.

 

 

앞에서 보면 엄마가 바가지 씌워서 앞머리 싹둑 짧게 자른 것처럼 보이는 이 길고양이 이름을 딸이 ‘호식이’라고 붙였다.


 

친구의 실수 덕분에 오후 느지막이 기운을 억지반으로 차려서 밖으로 나갔다. 친구네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네 바닷가에 들러서 보름달도 보고 고양이도 보고 왔다. 가끔 보름달 뜨는 날 저녁에 혼자 바닷가에 나가서 바다에 비친 달을 보며 혼자 걸었다. 23년 만에 딸과 함께 밤에 저 길을 처음으로 같이 걸었다. 숱하게 혼자 걷던 길. 올해 이 동네에서 지내는 마지막 추석이라고 나름 기념할만한 기록을 남긴 셈이다.

 

친구가 고기를 그 통에 제대로 담아서 가져왔더라면 추석엔 그대로 누워서 꼼짝도 못 했을 테다. 인생에 크고 작은 변수는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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