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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대나무 숲 & 비타민

by 자 작 나 무 2023. 10. 8.

2023년 10월 6일

점심을 같이 먹자는 문자를 받고 근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샤브샤브집을 떠올렸다. 평소에 급식소에서 식판 놓고 주는 밥 먹는 것 외에 밖에서 밥 한 번 같이 먹고 싶어도 시간이 맞지 않아서 밥 한 번 같이 먹은 일이 없었다. (아웃렛에 쇼핑하러 가서 밥 한 번 같이 먹기는 했다) 주문한 해물이 나왔을 땐 사진 찍지 않고 먹기 바빴다가 뒤늦게  해물을 거의 다 건져먹고 사진을 찍었다.

 

같이 쇼핑하러 아웃렛에 함께 가기도 했고, 집에 들렀다가 그댁이 교회인 것도 알게 됐다. 참 곱고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다. 눈이 크고 맑아서 사슴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자기 또래인 줄 알고 처음에 아주 반갑고 편하게 생각했다는데 생각보다 내 나이가 많아서 놀랐단다. 봄에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젠 확연히 내 나이만큼 보인다.

 

앞으론 꽃사슴 같은 H선생님께 힘들고 아픈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내게 말을 계속 걸어주고 안부를 물어줘서 말하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그분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기 드물게 고운 사람이다. 내가 타지로 이사하고 이 지역을 떠난다고 했는데도 나를 계속 만나고 싶다는 의향을 표현해 줘서 고마웠다.

 

나를 찾아올 때마다 책상 위에 건강식품을 하나씩 올려놓는다. 나는 뭘 해드릴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는데 내 일상에 지치고 바빠서 밥 한 끼 사드리는 것으로 때웠다.

 

전에 실내용 슬리퍼를 너무 낡은 것 신고 다녀서 새 슬리퍼를 사왔는데 발 사이즈를 묻지 않고 샀더니 작아서 반품하고 다른 사이즈를 구하지 못해서 넘어갔다.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마음씨 곱고 얼굴도 예쁜데 손도 곱다. 머슴 손 같은 내 손과 달리 어쩌면 저렇게 손도 예쁠까..... 사람을 좋아하면 뭐든 좋아 보이고 예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 H샘은 공주 같다. 지금도 저리 예쁜데 한참 어릴 때는 얼마나 예뻤을까......

 

안동 과수원집 딸로 태어나서 곱게 자라셨다고 들었다. 바닷가 태생에 갯바람 맞고 자란 나와는 인종이 다른 것처럼 뽀얗고 여리여리하고 곱상한 외모가 보호본능을 유발한다. 여태 내 문제에 힘겨워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 한 번 표현한 적이 없다. 언젠가 편안하게 농담처럼 말해주려고 글로 써놓는다. 좋은 사람은 처음부터 내내 좋다. 

 

 

 

*

일찍 조퇴하고 나와서 점심을 저렇게 거하게 먹고, 병원 두 곳에 들러서 특정 날짜로 진료확인서를 받았다. 상담하는 의사를 만나서 대나무 숲에 토하듯 내 감정을 토로하고 눈물 바람한 뒤에 처방전을 받아서 나왔다.

 

그리곤 집에 혼자 돌아가려니 마음이 너무 쓸쓸해져서 딸내미 학교에 가서 한참 기다렸다. 약속도 없이 갔으니 저는 저 할 일을 하고 있을 터라 내가 왔으니 당장 나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녁은 같이 먹지 않기로 했다가 뭐든 먹어야 할 때여서 사람이 붐비지 않을만한 식당을 골랐다. 딸이 그날 먹고 싶어 하는 메뉴가 있는 식당을 고른다. 

 

점심, 저녁 두 끼를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게 잘 먹고 집에 돌아와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두 사람은 요즘 나의 대나무 숲이자 비타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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