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오늘 우연히 2005년 여행기를 한 편 읽었다. 엠파스 블로거 시절에 쓴 것이 다음에 옮겨지면서 사진이 다 깨졌다. 사진 파일이 어딘가에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삶을 돌이켜본다는 것, 오늘 내 삶의 조각 하나 그림자 하나가 나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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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나는 여행이 마뜩잖은데 몸도 시원찮아서 오늘은 내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에 기대어 정말 쉼 그 자체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8시까지 모닝콜이 울릴 때까지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간 대충 보고 넘겼으나 떠올라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두 번째 영화를 보다가 문득 멈췄다. 잊고 있던 내 습성이 기억났다.
얼마 전에 검색해서 알아낸 거제 옥포에 있는 인도 음식점에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니 기운이 달린다. 밀린 일기를 두어 편 사진과 영상 저장하려고 쓰다 보니 희한하게 기운이 생기는 거다. 이런 게 나였지......라는 생각에 없던 힘이 생겨서 냉동실에 새로 장만해 둔 새우를 꺼내서 해동하고 갖가지 채소를 다져서 새우전을 부치고 가지전도 부쳤다.
딸이 있을 땐 쓰지 말라던 부추까지 썰어 넣었더니 향이 강하다. 왕새우 다섯 마리 부쳐서 두 개 먹고 나니 지친다. 가지전을 더 많이 먹었다. 식욕이라곤 없다가 내 손으로 나를 일으키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다는 생각에 불쑥 꺼낸 새우에 채소를 다져 넣고 지지고 튀기는 거였다. 오랜만에 커피도 한 잔 내려서 마시고 이제 사람 같아졌다는 생각을 했는데 배불러서 거제 옥포까지 갈 의지가 약해졌다.
끓여놓고 잊고 있던 시래깃국도 다시 끓여놓고 지친 몸을 하루 쉬게 하니 이제야 정신이 좀 든다.
'화엄에 오르다'라는 김명인의 시를 옮겨 쓰고 화엄사에 들렀다가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배 타고 소록도까지 딸을 데리고 들어갔던 여정을 찾아냈다. 차 없이 그렇게 깊숙한 곳까지 잘도 찾아다니며 살았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https://vasana.tistory.com/1679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에 오늘은 참 감사하다. 여행하고, 생각하고, 기록을 남긴 것. 이미 흩어진 시간에 매달릴 이유는 없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이 그렇게 기록으로 남아있어서 돌아볼 수 있으니 감사하다.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묻어두고 컴퓨터 하드 디스크 날리면서 날아가버린 많은 기록과 기억은 이제 어쩔 수 없지만, 알록달록하게 남은 기억의 조각이 오늘 나에겐 참으로 감사하다. 그만 헛디딜 뻔한 걸음을 멈춰 설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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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마침 그 책의 저자를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다가 그 책을 선물했다. 마땅히 읽을만한 이가 읽고 발견할만한 눈이 있는 이가 발견하는 게 어떤 책이거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책은 아껴서 읽고 딸에게 넘길 참이었다. 그래도 뭔가 내가 아주 아낀다고 생각한 것을 남에게 선뜻 건네주고 아깝지 않았다. 아직 몇 장 읽지도 못했으니 그 책을 다시 사고 싶은데 연휴가 껴서 온라인으로 사서 내 손에 잡을 날까지 기다리기 답답해서 어제도 넓은 도시에 있는 서점에 가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가 기운이 달려서 커피만 마시고 들어왔다.
단순히 책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은 아직 여전하다. 더 알고 싶고 더 나가고 싶고, 더 발전하고 싶다. 20대부터 그 부분에 관한 깊은 대화와 토론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찾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그 사이 딸 키우며 사느라 오그라들고 쪼그라든 내 알량한 주머니가 이제 텅 비고 볼품 없어져서 눈 밝은 이를 만나도 한마디 제대로 된 질문도 할 수 없겠다.
20대 중후반에 나는 그 끝을 찾아서 한없이 헤맸고, 온라인에 그런 내용을 다각도로 전파하는 의미로 책을 필사하듯 문서로 온라인에 올리는 일을 도모하고 시작할 즈음에 딸이 생겼다. 내가 20년 넘게 살아남기 위해 겨우 숨만 쉬고 사는 동안 어떤 분은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한 것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겐 없지만, 읽고 일부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지나온 길 어딘가에서 나는 이런 삶의 조각을 이어왔겠지. 전생이든 현생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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