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이른 퇴근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오늘 일정이 만만치는 않았고 계획보다 늦게 퇴근하면서 지쳐버렸다. 그 일정 하나를 포기하고 조금 일찍 퇴근해서 꽃이나 나무나 보면서 유유자적 쉬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기대한 것에 못 미치는 강의를 두 시간 넘게 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들었다. 기대치가 높았다는 말이 오히려 맞는 표현이겠다.
돌아오는 길엔 저녁도 먹고 싶지 않고, 길이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침 짧은 구간이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 구간에 공사 중이어서 차선 하나를 막아놨다. 국도보다 못한 속도로 기어가듯이 왔다. 나에겐 아무래도 고속으로 달리는 물체 안에서 느끼는 스릴감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나 보다.
비행기를 타야겠다. 지상에서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속도감과 땅에서 떨어져서 느끼는 안도감을 느껴본지 오래다. 오늘 딸이 원서에 넣을 사진을 찍었다며 사진을 보내준다. 비대칭인 얼굴을 대칭으로 수정해 줬다는데 내 눈엔 어색하다. 내 얼굴도 만만찮게 계속 비틀어지고 휘어져서 심각한 비대칭이다. 점점 얼굴 일부분이 비뚤어져서 얼굴이 달라진다. 딸이 그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괜찮으면 나도 예약해 준다고 말한 게 떠올라서 가야 할지 망설여진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 나도 생각났을 때 사진을 찍어야 한다.
스트레스 - 고속도로 - 비행기 - 여권 사진 - 여행
끝에 여행으로 마무리 되는 내 생각의 흐름은 도망치듯 잠시 피하고 싶은 현실이 오래 무겁고 퍽퍽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저녁은 먹고 싶지 않아도 아무 생각 없이 차에 몸을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낯선 곳에서 한참 방황하다 돌아갈 곳을 떠올리고 싶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게 싫으면 더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겠단 결심이 설 때까지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겠다. 고작 혼자 해내는 생각이 그런 거다.
혼자 떠날 수 있다면 파리에 내려서 렌트카를 타고 에트르타로 달리고 싶다. 거기가 지구의 끝인 듯. 그 언덕에서 바람맞으며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보고 싶다. 힘들면 이런 상상이라도 하고, 말을 뱉으면 어느 날 그렇게 해버리는 거다. 오늘은 이렇게 나를 달래고 일찍 잠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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