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2
내 보물상자에 남아있던 편지와 엽서를 모조리 읽어본다. 내 딸이 그 상자를 접수한 뒤에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한 장씩 다 들여다보는 거다. 그나마 옛날 제자들이 보낸 편지나 엽서를 읽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외에도 꽤 많은 종류의 편지를 저가 다 읽는 게 조금 신경 쓰인다.
이럴 땐 정공법으로 이 난관을 돌파하는 거다. 내가 받은 편지는 지금 내 대인관계로 미루어보아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로 발 넓고 많은 사람과 어떻게 저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만큼 신세계로 읽히는 모양이다. 친구, 동료, 제자, 선배, 후배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진심 어린 마음을 주고받은 흔적이 꽤 많은 분량 남았다.
여러 해에 걸쳐서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내용의 편지를 읽으며 나를 재발견한다. 나의 10대, 20대는 저러한 면이 있었구나...... 어지간한 편지는 온라인에 옮겨볼까 생각한다.
첫 번째 사진 속에 엽서를 보낸 아이는 자기 모습을 기억해 달라고 사진도 줘서 아직 간직하고 있다. 열면 소리가 나는 오르골 보석함을 선물로 줘서 1993년에 받은 그 보석함을 2023년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때 선물로 받은 부딪히면 맑은 소리 나는 석재 풍경도 30년 남짓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용돈으로 내게 줄 선물을 샀고,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편지와 같이 준 그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딸이 종종 왜 그런 낡은 물건을 오래 쓰느냐고 물었을 때 그때 받은 마음을 놓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때 내 나이와 같은 나이가 된 딸이 내가 받은 편지를 꺼내 읽고는 눈을 반짝인다. 그 시절엔 SNS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어서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겠지만, 나처럼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고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를 평가한다.
2023년 내내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지친 내 삶을 불쑥 정리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많고, 쉽지 않겠다.
1994년에 제자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느라고 썼다가 부치지 않은 편지 봉투도 남아있다.
1992년에 친구 생일에 보내려고 내가 썼던 생일 축하 카드. 저 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써서 보냈을까? 저 친구는 내 생일에 우체국에서 생일 축하 전보를 보내줬다. 어제 내 보물 상자에 있던 물건 중에 생일 축하 전보를 두 장 발견하고 내 딸이 신기하다고 한참 웃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 생일엔 그런 것도 주고받는 시절을 살았고 내가 받은 생일 축하 카드나 전보를 읽고 딸이 신기해했다.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건, 나도 많이 줬다는 거겠지. 편지 내용을 읽어보고는 내가 참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라고 말한다. 그냥 그땐 그런 사람으로 살았고, 지금은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기 힘든 시절을 산다.
너무 힘드니까 좀 쉬어야겠다고, 좀 기대자고 말했다. 딸은 자식이어서 아무래도 내 쉴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딸이 기숙사에서 4년 만에 짐을 빼서 집에 돌아온 지난 12월 말 이후에 내내 한 방에서 같이 지냈다. 이사하기 전에 20여 년 살던 집은 방 세 칸에 바람벽이 둘러친 움막 같았다. 살던 집 반절도 안 되는 집에 들어와서 거실에 잔뜩 짐 상자를 쌓아두고 누울 자리만 겨우 치웠다.
딸이 쓸 방에 둘 침대가 오늘 도착해서 그 방에 잔뜩 쌓아뒀던 짐을 어젯밤 늦게 치우고 오늘 드디어 분리된 공간에서 눕게 됐다. 그날 이후에 그렇게 지치고 아파도 낮잠 한 번 잘 수 없었던 시간, 오늘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겨서 잠시 눈을 붙였다. 할 일이 많으니 생각이 많아서 잠을 잘 못 잔다. 머리가 맑아야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지 못해서 아직 벌서는 기분이다. 생기부 다 써야 짐 정리도 할 수 있다. 그 일을 마무리해야 마음 편하게 낡은 가구에 페인트칠도 하고, 이사했다고 안부도 전할 텐데......
'흐르는 섬 <2020~2024> > <202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유 (0) | 2024.02.17 |
---|---|
2.12 (0) | 2024.02.12 |
서민이 먹을 수 없는 김밥 (0) | 2024.02.10 |
2월 10일 (0) | 2024.02.10 |
옛날 사진, 기억 (0) | 2024.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