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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치유

by 자 작 나 무 2024. 2. 17.

2024-02-17
이사한 지 날짜는 꽤 지났지만 그 사이에 제대로 살림살이를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6일이 최종 마감일인 일을 16일 새벽까지 붙들고 손질하고 또 손질했다. 며칠 내내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없다. 마감 전에 끝내고 그냥 쓰러지면 쓰러지는 거지 생각하고 15일에 마무리한 것을 또 손질하고 있는 나를 보고 다시 반성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그래서 힘든 거다.
 
사흘쯤 제대로 깊은 잠을 못 잔 탓에 엉망인 상태로 집 근처 병원에 갔다. 새 직장에 제출할 건강 검진, 검사 등등 서류 준비를 마무리하고 집에 와서 사흘 만에 어스름하게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자고 깨도 한결 낫다.
 
어제저녁에 그랬다.
"나, 내일 병원 가서 검사받고 나면 집에 와서 고구마 폭식할 거야. 고구마 좀 구워 놔."
밤늦게 얄밉게 밤참을 먹는 딸에게 농담처럼 비장한 말을 던졌다.
 
낮에 집에 돌아오니 딸이 과연 고구마를 구워놨다. 군 고구마 세 알 먹고 그대로 누워서 한 시간 단잠을 잤다.
 
그렇게 내 악몽은 끝났다. 일을 끝내고 16일부터 살아야겠다고 15일 밤에 결심했다. 이대로 낯선 도시에서 방에 틀어박혀서 쉰다고 나아질 일은 없을 거다. 뭐든 일을 벌여놓고 그다음 일은 다음에 해결하자. 며칠 탐색해 본 결과, 이 도시에서 내가 구하는 일자리에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리는 없다. 
 
자정 전에 어딘가에 원서를 접수하고 새벽에 하던 일을 마치고 아침에 잠시 졸다가 깼다. 그날을 기점으로 머리 복잡한 일은 정리되고, 악몽은 조용히 사라졌다. 장면 전환 기점이 그날이었다. 
 

 

며칠 전에 김밥 싸 먹으려고 샀던 조린 우엉이 어찌나 맛없던지 입맛만 버렸다. 그래서 마트에서 우엉을 사서 손질해서 채 썰고 조렸다. 설마 마트에서 만들어서 파는 것보단 낫겠지.
 

얼마 전에 김초밥을 두어 번 먹고 나서 맛 들였는지 또 김밥을 싸달란다. 처음엔 옛날 김밥처럼 해달라고 해서 단무지 넣고 쌌더니 맛이 이상하다는 거다. 그래서 단무지 빼고 아보카도를 썰어서 넣었더니 그제야 맛있다고 좋아한다.

시금치 없이 단무지 넣지 않고 아보카도를 넣었더니 입에 맞다는 거다.
 

 

이번에 임용시험에 합격한 딸 친구들은 발령 받고, 연수받고 새 직장 이야기를 벌써 나누는 모양이다. 친구 누구는 무슨 연수를 들었고, 친구 누구는 어디로 발령을 받았다고 전한다. 내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것 같으니 올해는 저가 합격해서 일하게 되면 나는 한 해 쉬고 싶다고 그간 몇 번 말했다. 별 내색 하지 않았지만, 힘겨워하는 나를 보며 저도 속이 상했을 테다. 
 
그래서 오늘은 딸이 먹고 싶다는 김밥 싸주고, 미역국도 끓이고, 뭇국도 끓였다. 내일 하루 잠시 쉬었다가 월요일부터 새 직장에 출근하고, 금요일에 딸내미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목요일 오후에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며칠간 내 책상이 없어서 서로 방을 바꿔서 썼다. 오늘 내가 쓸 새 책상을 고르다가 마땅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딸이 쓰던 낡은 나무 책상을 내 방에 들여놓았다. 딸에게 새 책상을 사주기로 했다. 며칠 묵은 탁한 공기를 내보내고 먼지를 털고 방을 말끔하게 닦아서 제 침구를 옮겨 놓으니 이제 뭔가 안도감이 드는 모양이다.
 
나도 오늘에야, 아니 이제야 처음 내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매일 조금씩 좋아질 거다. 매일 조금씩 나아질 거다. 오늘밤엔 잠들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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