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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2.28

by 자 작 나 무 2024. 2. 28.

2024-02-28

딸에게 화를 낼 땐 그대로 세상이 끝날 것 같았다. 다시는 딸과 마주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삼키거나, 다음엔 좀 달라지려니 생각하고 지나쳤다.

 

시키지 않는 일은 찾아서 하지 않는다. 설거지하면 그릇 씻고,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식으로 집안에 소소하게 손 가는 일마다 그렇다. 딸이 고약한 게 아니라, 이것저것 시키고 가르치지 않고 키운 내 탓이다. 때 되면 다 제 손으로 할 일인데 내가 할 수 있을 땐 내 손으로 하겠다고 생각하고 어지간하면 집안일을 시키지 않고 키웠다. 그래서 그런 거다.

 

왜 이런 것도 좀 하지 않느냐고 말하기 입 아파서 말하지 않으니 이사한 지 한 달이 지나도 살림살이 정리가 안 된다. 내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하면 되는데, 생각처럼 내 몸은 그렇게 움직이기엔 회복이 덜 되었다. 어젯밤에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려서 손 가는 일을 좀 하고 나니 오늘은 기운이 없어서 축 늘어진다.

 

- 카페인 주입

 

노트북과 모니터를 HDMI 코드를 사서 연결하고 나니 모니터 앞에 앉는 게 한결 낫다. 어제 한번 큰소리를 낸 뒤에 딸이 아침상도 차리고 노트북과 연결할 키보드도 찾아서 닦아준다. 내 딸은 정확하게 지시어를 입력해야 작동하는구나...... 같이 오래 살아서 알 거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다. 

 

나도 타인의 생각을 혼자 다 아는 듯 읽어내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내 감정 외엔 읽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기억해야 할 일을 기록하는 것과 앉아서 고인 생각을 털어내며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밤에 피곤한 상태로 기록한 것은 낮에 읽으면 이상하다.

 

 

*

어느새 해 바뀐 지 두 달째. 숨 돌리고 일주일 정도는 가만히 고여서 쉬고 싶었는데 그럴 여유 없이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됐다. 이미 쫓기는 심정이다. 건물숲에 점 하나. 지금의 나는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우주에 잠시 흔들리다가 가는 먼지 한 톨 같다.

 

강 선생님께서 내 딸 졸업식에 오셔서 딸에게 건네주신 카드에 '** 이모'라고 쓰신 걸 봤다. 내 딸에게나 나에게나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따뜻한 손길과 보살핌, 가족에게나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랑을 주셨다. 드린 것 없이 받기만 하는 게 머쓱해서 피해 다니던 때도 있었다. 이젠 간혹 시간 맞을 때 밥 한 번 같이 먹는 것도 어렵겠다.

 

엊그제 딸내미 졸업식에 다녀오는 길도 만만찮았다. 선생님 계시는 거제까지 하룻만에 다녀오는 건 쉽지 않겠다. 졸업식날 결국 같이 식사도 못하시고 돌아가시게 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 

 

 

*

마음이 무거워지니 몸도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몇 해 전까진 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생각이 팔팔했는데 요즘은 마음이 천 년은 산 것 마냥 무겁다. 딸이 찾아낸 30년 지난 일기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일부 기억 외엔 완전히 다른 사람인 듯 느껴진다.

 

딸이 대학 졸업해서 고졸은 면하게 했으니 내 할 일은 다했다 싶은 생각에 긴장이 풀린다. 나를 지탱하게 했던 의무감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당분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숨만 쉬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런 것으로 설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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