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7
엊그제 오후 3시쯤이었던가, 추석 연휴에 제주도 가는 건 어떠냐고 딸이 물었다. 이미 숙소나 항공편 예약이 미리 다 끝났을 테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것이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고 못 간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당장 떠날 수도 있는데 굳이 비싸고 사람 많을 때 왜 가느냐고 말했다가 그 길로 곧장 제주도 항공권을 사게 됐다.
가방 싸고, 머리 감고 옷 갈아입고 나가서 공항에 도착하고, 수속할 시간 계산하니 여행이 가능한 시간에 비행기표가 남은 게 있었다. 밤에 도착해서 곧장 숙소로 가야 할 시간에 도착하는 것이니 빈자리가 남은 거다. 그래도 이렇게 급히 아무 준비도 없이 나서보기는 처음이다. 렌터카 예약부터 하고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았다.
종종 성게국수나 회국수 먹으러 가자고 말을 꺼내곤 했던 식당에 딸과 함께 가서 맛있게 국수 한 그릇 먹고 온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어릴 때 재밌게 놀았던 기억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기에 에코랜드에서 하루 놀고, 다음날은 한림공원에서 놀았다. 그 외엔 지나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 찍고, 바닷가를 따라 드라이브한 것으로 우리 여행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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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넣어갔지만 이틀 동안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책 한 장 넘겨볼 수가 없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딸내미 사진을 수없이 찍어주고 그 중에 몇 장 건지게 해 주느라고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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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일 잠옷 바람에 거실에서 뒹굴거렸다.
인간의 감정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며, 뇌의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감정은 결국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휘발된다. 짧게 스쳤던 인연은 감정적 잔재도, 기억할 만한 추억도 남기지 않으므로, 그들과 다시 연결될 일도, 만날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어떤 감정은 우주 공간에 일시 정지 상태로 물방울 모양 큐브에 담아둔 듯 멈춰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감정의 무중력 지대에 사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는데 어디서 불쑥 솟아오른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혼자 자주 웃었다. 딸과 함께 여행하면서 아무 일도 없이 혼자 싱겁게 웃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 말하고 말았다.
제주도에 도착했던 첫날 저녁에 숙소에 여행용 가방을 넣어놓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숙소 안에 있던 치킨집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딸과 함께 생맥주 한 잔씩 마셨다. 갑자기 아무 준비 없이 너무 서둘러서 나온 여행이어도 어떻든 둘이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기로 했다. 살짝 취기가 올랐을 때 내 착각 같은 감정의 변화에 관해 딸에게 말했다.
"헛갈릴 것 없잖아. 정말 그런 것도 모르겠어? 엄마가 고등학생이야? 아니, 고등학생 정도여도 그 정도 했으면 알겠구만."
이전에도 나 혼자 감정에 빠져, 그 착각의 깊은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혼자 아파하고, 혼자 울다가, 끝내는 스스로 포기하고 감정을 정리해 왔다. 이쯤 되면 내 마음의 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누군가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한, 그것을 착각으로 여긴다. 더는 짝사랑 같은 감정을 품을 나이는 지나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순간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금 그리움이 피어난다. 그 순간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이제야 가슴 한구석에서 설렘과 그리움, 아쉬움이 차오른다.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늦게야 나를 덮친다.
아, 가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