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1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오후 늦게 수목원에 갔다. 적당히 그늘지고 바람도 살짝 불어올 것 같았는데, 예상치 못한 진입 금지 표지판이 나를 막았다. 평소와는 다른 길로 경사진 오르막을 따라 구름다리를 건넜다. 여전히 더운 날씨에 숲길을 걷는 것이 생각보다 벅찼다. 무심코 입었던 흰 블라우스는 땀에 흠뻑 젖었다.
창연정에 올라 강을 바라보았다. 물가를 따라 걷고 싶었던 마음이, 그곳에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바람이 스며드는 이곳에서, 나는 그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사방으로 바람이 드나드는 이곳에서 바람이나 실컷 맞고 가야겠다. 앞뒤가 잘리고 막힌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아야만 내게도 손가락이 생길 것 같은데, 지금은 손가락이 없다. 어느 가을, 걸어도 되는 길인 줄 알고 나섰다가 진입 금지 표지판 앞에 멈춘 적이 있다. 겨울에도 똑같았다. 그 일이 두 번 반복된 뒤로는 그 길을 피해 돌아서 다녔다.
그날 이후, 나를 거듭해서 막아선 길 앞에서 나도 아무 말 없이, 손가락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
2022-05-18
나는 누구와도 깊은 소통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다른 가족들과는 전혀 연락하지 않고, 오직 딸과만 소통할 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연락하면 무엇이든 이야기하지만, 내가 먼저 전화를 걸 일은 거의 없다. 나를 찾는 순간에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일상 속 어느 순간에 내가 끼어들면 방해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업무 중에 카톡이나 전화가 오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듯, 친구들도 각자의 삶에 누군가를 불러들이는 것이 편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 수 없으니, 나는 그저 그들이 나를 찾을 때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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