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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비를 맞고 돌아왔다

by 자 작 나 무 2024. 9. 11.

2024-09-11

 

'블랙 이글스'의 공연 연습으로 이 동네 하늘은 내내 시끄러웠다. 어쩔 수 없이 어디든 나가야 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수목원 입구에 도착했다.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가 우산을 가방에 넣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9월이 되면서 관람 시간이 다시 오후 6시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어차피 오래 머물지 못할 테니 그냥 들어가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나오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 뭐라 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입장했다.

 

화장실은 걷다 보면 곳곳에 있을 테고, 비가 온다면 한 번쯤 숲에서 비를 맞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조금은 반항적인 생각이 나를 멈추게 했다. 준비하는 것이 좋다는 내 이성적인 생각을 눌러버린 것이다. 가끔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오늘은 혼자 수목원에 왔으니, 그 짐승 같은 충동이 날뛰어도 남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냥 두고 보았다. 메타세쿼이아 길에 도착했을 때, 공사 중이라 출입 금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사실 매표소에서도 황톳길은 갈 수 없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그냥 와버렸다. 단순히 그러고 싶었던 것이다.

 

이내 구름다리로 올라가려고 경사진 길을 택해 걸었다. 세상은 어차피 평탄하지 않으니, 오늘은 평소에 피했던 계단도 한 번 올라보자는 훈련 삼아 걸어보기로 했다. 날이 흐려서인지 일찍 어두워졌고, 늦은 오후의 흐린 날씨에 수목원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서울 것도 없었다.

 

어두운 숲길을 혼자 걷는 건 언제나 주저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도 입장권을 끊고 들어왔으니, 내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누군가는 나를 찾겠지. 딸에게는 수목원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도서관에 가겠다고 하고는 하얀 블라우스를 걸치고 나왔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수목원에 올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름다리를 건너 창연정으로 이어지는 언덕을 넘으니, 정자에서 산책을 마친 노부부가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고, 저 멀리 하늘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정자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두어 장을 읽다 보니,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종이 대신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에 바로 글을 쓰는 일이 더 익숙하다. 한결 편하다. 생각나는 대로, 흘러나오는 대로 혼잣말을 적다 보니, 어느새 빗방울이 굵어졌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 동안 중년 남자가 우산을 들고 정자로 올라왔다. 주차장까지는 적어도 500미터는 족히 될 텐데, 일단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뛰어 걸음은 점점 느려져 가벼운 산보로 바뀌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은 게 문제였다. 더는 뛸 수가 없다. 칠부 소매의 면 블라우스는 땀에 젖었고, 빗물이 섞여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런데 묘하게 신이 났다. 산길을 종종걸음으로 걷다 보니, 주차장이 있는 정문까지 돌아가는 우회로를 다 걷다가는 바지가 땀과 비에 홀딱 젖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지인과 장난 삼아 "이 길에서 확 밀어버리면 어쩔래요?" 하며 웃었던 그 길을 지나며, 곁눈으로 보인 경사진 언덕을 힐끗 보았다. 길도 없지만, 저 길을 내려가면 낮은 담장 너머로 분명 지름길이 될 것 같다는 계산이 순간적으로 섰다. 별생각 없이 그대로 급경사를 타고 내려갔고, 낮은 담장을 넘었다. 다행히 바지가 젖기 전에 차에 도착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혼자 비를 쫄딱 맞고 히죽거리며 집에 돌아오니 딸은 운동하러 나가고 없다. 훌렁 벗고 따뜻한 물에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보니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기분 좋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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