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1
카드 결제해야 할 날짜가 차례대로 돌아오니, 현실 세계에서 잠시 떠났던 정신이 착륙 신호를 보낸다. 어쩌다 맥주 한 잔 마시는 것 이상의 음주를 하지 않던 내가 사흘 연이어 술을 마신 것이 이 모든 문제 중에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다른 일마저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 고칠 수 있고, 고쳐야 하는 것은 그 부분이다.
어차피 내 주변엔 나에게 술을 권하거나 술자리에 부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으니 내가 대놓고 술꾼이 되지 않는 한에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대하기 어려워서, 술을 핑계로 대뇌가 작동하지 않는 사이에 내 멋대로 앞뒤 없이 나오는 말을 필터 없이 내놓아서 문제가 생겼다.
사람마다 좋아하거나 꺼리는 일의 종류는 다르고, 다양하다.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굳이 두세 번씩 할 의향이 전혀 없는 나로선, 싫다고 하는 말이 상황 상 농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착각을 유발한 다른 재밌는 장난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되지 않아서 순간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나에게 정색하는 그 순간을 겪은 뒤에 어느 선에서 어떤 코드에 맞춰서 말하고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그 순간 이후로 눈치를 살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불편한 것이 풀리지 않았는데 그가 걸어오는 장난은 천연덕스럽게 받을 수 없었다. 장난, 농담, 진담의 영역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잘 모르면서 오랜 세월을 먼발치에서 스쳤다고 잘 아는 듯 생각한 내가 잘못한 거다.
솔깃했지만, 받지 말았어야 할 제안을 넙죽 받은 거다. 내가 뭐라고 그런 호의를 그대로 받아? 라고 처음에 의심한 것이 오히려 이성적인 생각이었다. 그보단 감정이 앞서서 이성적인 계산이 전혀 되지 않았다. 참 보기 드문 감정의 범람 사태였다.
종종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딘가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한결같은 빛으로 반짝이는 것 같았던 곳을 자리를 옮겨가며 바라보곤 했다. 그 별에 사는 어린 왕자를 먼 행성에 사는 내가 상상으로 더듬으며 그려내고, 마침내 쓸쓸한 때마다 가슴에 품고 시작한 짝사랑 같은 감정이 있었다. 그 감정을 잃지 않고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딱히 이유를 헤아리지 않고 그냥 좋은 감정으로 늘 응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다시 생기긴 어려우니까.
이번엔 내 욕심이 과했다. 내 감정 정도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술을 연이어 마시기 전엔 가능했지만, 좋은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뭔가 동참하려던 의욕이 과해서 이번 일로 나는 술잔을 든 손목을 잘라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며칠만 지나면 어떤 감정을 왜 느꼈는지 기억나지 않을 거다.
나이 들면 못할 것 같은 게 이런 거였다. 적절한 상황의 조합 덕분에 20대에 해봤어야 했지만, 해보지 못한 경험을 했다. 한 번이어서 재밌었다고 표현한다.
나에게 정색하는 냉정한 그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에 지레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어야 했는데 감정 조율이 되지 않으니 그게 안 되더라. 연애는 해 본 사람이 잘하는 거지. 나는 이런 방면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서 앞으로도 연애는 어려운 일이 되겠다.
*
어제 아침에 고용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어제로 예정되었던 교육이 없으니 다음주에 오라는 거다. 한 달을 맨땅에 헤딩하듯 살았는데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다. 어차피 금액이 크지도 않으니 현재 내 삶에 숨만 쉬어도 나가는 월세, **, *** 등을 내고 나면 빨 손가락도 남지 않게 되겠다. 이런 주제에 여행을 다닌 건 넘치는 일이었다.
현실 직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분명히 그때문에 어떻게 일을 찾고 생계를 유지할지 걱정을 쏟아내고 계획을 세우려고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여전히 감정이 앞서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당분간 슬기로운 백수 생활을 잘 이어가기 위해 선선할 때 자주 걸으러 나가야겠다.
'흐르는 섬 <2020~2024> > <202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둘레길 걷기 (0) | 2024.10.01 |
---|---|
산책 나가기 전에..... (0) | 2024.10.01 |
회춘 (0) | 2024.09.30 |
....... (0) | 2024.09.30 |
대략 난감 (0) | 2024.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