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0
하늘은 잔뜩 흐리고 바람은 차고, 갈 곳은 없는 날. 내가 걸음을 떼는 곳은 결국 도서관이다. 스산한 날 오후에 가벼운 걸음으로 산책하기엔 옷을 겹겹이 입거나 옷깃을 여며야 하는 날씨로 급작스레 변했다. 서서히 변한 게 아니라 갑자기 추워져서 엊그제까지 여름 같았다가 오늘은 가을 날씨다. 그런데 그 격차가 크니까 갑자기 겨울이 금세 올 것 같아서 이런 날씨에도 살짝 움츠리게 된다.
이 도서관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아서 여느 카페보다 훨씬 낫다. 새로 나온 책 코너를 쓱 훑고, 지난번에 빌려간 책 중에 가장 흥미가 떨어지는 책을 펼쳐서 몇 가지를 메모하고 반납했다. 우즈베키스탄 문화의 이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 종종 고개를 들면 가을이 느껴지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안락사 찬반 논쟁을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자기 입장을 대변할 논거를 여러 가지 찾아오라고 주문한다. 찬성도 반대도 각각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논거가 충분하다. 이 책을 읽으며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마땅할 이들이, 법으로 가로막힌 안락사 대신 선택한 단식 존엄사의 과정을 함께 해본다.
무엇보다도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인간 지옥의 상황이 가장 최악의 결과를 낳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공감한다.
2024-10-21
36시간 단식한 뒤에 음식을 새로 장만하고, 다시 24시간 단식하겠다는 생각은 바로 접어야 했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심해져서 약을 꼭 먹어야 할 상황이 되어서 어제 끼니를 챙겨 먹고 더 악화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새벽에 잠들지 못하고 잡념에 시달리다가 과자 봉지를 열어서 야금야금 먹다 보니 한 봉지를 다 먹었다. 딸이 먹고 싶다고 해서 과자 사러 나갔다가 내 몫으로 산 것을 그냥 다 먹어버렸다. 역시 애매하게 뭔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중간에 끊는 게 힘들다.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을 만큼 이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물론 해결해야 할 일은 여전히 줄지어 있다. 어떤 반전이 필요한 시기다. 한 달만 쉬고 다시 일하려고 했던 건, 생활비 비축한 게 없어서 내가 감수해야 할 불편이 커질 것이 염려스러워서였다.
중학교를 돌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 몇 해간 끊임없이 고등학교에만 근무하면서 학기마다 생기부를 써서 내는 게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학생들의 삶에 어떤 좋지 않은 영향이라도 미칠까 봐 너무 무거운 마음으로 해야 했던 일이 부담스럽고 쫓기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꼭 한 학기만 그 시달림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중학교에 가면 학생들과 부딪히거나 감정 상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도무지 마음이 나서지 않았다.
내가 일하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방법도 없고, 그 상황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뭔가 사고, 먹고, 여행하는 게 불편할 것이다.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유년기조차 마음 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나는 내 힘으로 먹고살아야 될 팔자인 거다.
딸 친구가 SNS에 복권 당첨된 사진을 올렸다며 보여준다. 연금 복권이 뭐냐고 그런 거라도 사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내가 일을 하지 않는 현재의 삶이 혹시나 해결하기 힘든 일에 부딪힐까 봐 두려운 모양이다. 우리 삶에 현재는 이런 종류의 긴장감이 조금 필요할 수도 있다.
늘 어떻게든 해냈지만, 거부할 권리도 있다고 우기며 한 학기만 쉬련다. 진짜 쉬는 것처럼. 이렇게 쓰는 이유는 계속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두려움에 간혹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이다. 절대적 빈곤에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일해야 하는 내 상황을 돋보기로 키워서 보느냐, 이렇게 쉬면서 제대로 충전하고 휴식해서 더 길게 보고 멀리 나갈 힘을 키울 때라는 인식을 키워서 보느냐에 따라 몇 달 동안의 내 삶은 완전히 다른 길로 나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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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것을 사주지 않아서 낡아진 딸의 물건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새로 사주곤 했는데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내 손을 떠나서 그간 업그레이드 되지 않은 부분을 이제야 하나씩 발견한다. 4년 동안 떨어져서 살다가 다시 합쳐서 살기 시작한 뒤로 우리 사이에 생긴 간격을 조금씩 좁혀야 할 필요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젠 말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아서 모른다. 자신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만큼 나도 변수가 많은 시기여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내 에너지가 예전 같진 않아서 눈에 보이는 것도 적고, 판단하고 내 생각이 들어가서 변화를 줄 필요가 없는 부분에 뭔가 작용하는 결과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대부분의 관계나 일에 생각을 끊어버렸다.
생각이 많아서 쓸데 없는 에너지 소모가 많고, 피곤해지는 성향이 있어서 그걸 제어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이젠 무신경한 지경에 이르렀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지점을 잘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거겠지.
그래, 필요하면 말해. 난 말 안 해주면 몰라.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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