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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콧물, 재채기의 계절

by 자 작 나 무 2024. 10. 27.

2024-10-27

 

어제 반납해야 할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가 재밌어 보이는 책 몇 권을 빌려서 집으로 가자니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읽을 책 한 권과 손수건 한 장을 가방에 넣어서 공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내가 찜해놓은 벤치까지 가는 길에 좀 괜찮아 보이는 잔디밭엔 젊은 남녀들이 깔아놓은 자리가 꽤 많았다.

 

 

서로 껴안고 볼을 비비며 뭔가 하는 사람 사이를 어쩔 수 없이 지나쳐서 벤치에 앉으려다가 그 일대를 벗어났다. 책 읽을만한 그늘진 벤치는 그 이상 좋은 자리가 없는데 그 반경 일대에 젊은 커플들이 깔아놓은 돗자리가 대여섯 개나 된다. 대부분 같이 누워있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망설이는데 마침 딸 전화가 온다.

 

대전에 친구 만나러 간 딸이 저녁도 먹고 들어올 것 같아서 혼자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닐 판이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내 기분이 좀 꿀꿀하다고 톡으로 구시렁거려서 신경 쓰였던지 저녁은 나랑 같이 먹어주겠다는 거다.



저녁은 잘 먹었는데 콧물과 재채기가 수시로 정신을 멍하게 만들 만큼 피곤하게 흔들어서 뭔가 집중해서 할만한 일은 할 수 없었다. 연이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 화근이 되어 컨디션이 더 나빠진 모양이다. 밤늦게 알레르기 약을 먹고 겨우 한숨 붙였다가 아침에 깨서도 계속 훌쩍거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멍 때리기라도 할 참이었는데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콧물에 재채기를 남발하게 된다.

 

 

약 먹어야 하니까 밥 먹고, 밥 먹고 나니 곧장 카페인 중독된 머리에서 커피 한 잔 달라고 조른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며칠 전에 사 와서 조각조각 잘라서 냉장고에 둔 치즈 케이크를 한 조각 꺼내서 당충전까지 끝내고 알레르기 약을 먹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피곤했던 콧물 재채기는 잠잠해지고, 이제야 생각할 머리가 열린다. 빌려온 책 중에 드물게 소설책이 한 권 있다. 이 허구보다 더 현란한 허구 같은 세상에 살면서 지어낸 이야기 읽는 게 썩 재밌진 않아서 거의 읽지 않다가 요즘엔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나 가치관에 관심이 생기면 읽는다. 특이한 독일 작가가 쓴 소설책부터 읽으며 회색빛 하루를 넘겨보려 한다.

 

어제는 날씨가 그렇게 좋았는데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하루를 어영부영 보냈고, 오늘은 체력 미달에 날씨까지 별로여서 딱히 내키는 게 없다.

 

*

끊임없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것은, 결국 내 잘못이다. 잘 알지 못하다가 발견한 내 잘못, 알고 있었지만 뜻하지 않게 심하게 자극받아서 불쑥 튀어 올라온 내 잘못, 그래도 그런 걸 발견하게 된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여기련다.

 

이번에 발견한 것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내 운전 습관이다. 어제저녁에 딸과 대화하면서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했다. 딸과 둘이 탔을 땐 조급하게 하지 않고 천천히 잘하던 것을 감정이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전방 주시도 겨우 한다. 그럴 땐 음주 상태와 다를 바 없으니 운전하지 말아야 한다.

 

며칠 잠을 못 잤을 때, 지금처럼 알레르기가 심해서 정신이 혼미할 때, 많이 슬프고 마음이 힘들 때, 감정적일 수밖에 없으니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드니까 되도록이면 운전하지 말아야 한다. 그땐 앞에 절벽이 있다면, 그대로 밟아서 떨어지면 천 길 나락으로 떨어져서 즉사할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그대로 가속 페달을 밟을 테니까.

 

이 매트릭스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나만의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뇌에서 인지하는 방법을 전환하는 것, 감정 회로를 꺼버리는 거다. 이건 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버전. 두 번째는 삶도 죽음도 없는 이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

 

삶에 딱히 큰 애착이나 미련은 없고, 대단한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집중해서 감정적인 부분을 확대하지 않으면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 투성이어서 사는 게 영 재미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니까, 오늘 내 앞에 주어진 일상을 그냥 살아내면 되는 거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맞출 수 없다면, 물러서는 거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관계까지 나아갈 기회 없이, 곧장 화들짝 놀라서 달아난다. 이게 현실이다. 20대엔 이 정도 시도도 해보지 않고, 단순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고 끝내기도 했으니, 그나마 나이 들어서 조금 나아진 거다.

 

관계는 잇는다는 것은, 그간 단절되어 살아온 50여 년의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엄청난 통로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한한 애정으로 상대를 나를 돌보듯 연민을 가지고 대할 수 없다면, 어떠한 관계도 이어질 수 없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어디에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고, 나 또한 부족한 것 투성이이다. 

 

곁에 다가와서 내 삶을 들여다보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 없이 오래 살아온 내가 어떠한 접점도 없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친절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내가 흥분해서 숨도 쉬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차분하게 가라앉고 안정된 상황이어야 한다. 숨이 고르지 않을 때, 조언하지 말라.

 

*

콧물 재채기가 연신 나오면 참고 견디지 말고, 약을 먹어! 그게 한결 낫다. 이제 숨 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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