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30
두 달 정도 쉬니까 조금 쉰 것 같은데 애매하게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연속해서 하던 일을 하려면 봄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이 나이에 해보지 않은 어떤 일에 도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기엔 능력 부족, 체력 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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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락해서 물린 주식이 꽤 있었다.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절하고 나면 오른다. 나는 느긋하게 뭔가 기다릴만한 배짱도 여유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종류의 돈 놓고 돈 먹기엔 소질이 없다.
입에 풀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당분간은 일할 때는 할 수 없는 것을 찾아서 하는 것으로 일과를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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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관계를 잇는 일 없이 산다. 고향을 떠나 내륙의 낯선 도시에 온 까닭이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 알게 된 동창 중에 따로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은 드물고, 사회 생활하면서 일터에서 만나서 연락을 지속하거나, 우연히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서 알게 된 딸내미 친구네 가족들이 내 지인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나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거나 꾸준히 지켜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과 주로 친분이 생기고 그 관계를 10년이고 20년이고 이어간다. 한 번 친해진 사람과는 특별한 일이 생긴 경우를 제외하곤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왔다. 그래서 내가 딱히 사회성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많은 친구를 만들거나 아는 사람 숫자를 늘리는 데는 관심 없다.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한둘이면 만족한다. 고향엔 그런 사람이 있지만, 이곳에선 어떻게 친구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나이가 한참 들어서 굳어진 이 상태로 어떤 계기로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 싶다.
지난 주말에 막막하고 쓸쓸한 심정으로 혼자 카페에서 멍 때리다가 문득 생각난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 20년 전에 보고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1990년대 중후반에 피씨통신 동호회 시삽이었던 분이 이 근처에 사신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 시절에 우리 모친이 입원하셨을 때, 동호회 회원들과 그 먼 곳까지 문병을 와주셨던 분들이 꽤 있었다.
그만큼 내 대인관계는 온라인에서 시작했어도 오프라인까지 인간적인 관계로 잘 이어졌다. 그 동호회 회원 중에 어떤 분들은 크리스마스에 전국에서 사람들 모아서 우리 동네에서 모임을 주최하고 함께 우리 집에 와서 라면을 같이 끓여 먹기도 했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좋은 분들은 그 모습 그대로 평생 기억에 남을 거다.
내 연락을 받으신 그분은 곧장 답을 보내셨다. 엊그제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처럼 안부를 묻고, 내 전화번호가 없어져서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분 신혼살림 차린 집에 동호회 사람들이 무더기로 가서 밥을 며칠씩 먹었던 옛날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났다. 그때 나를 거쳐서 그 댁으로 간 작은 도움받은 일을 잊지 못하고, 내내 마음에 걸려서 조금 살만해졌을 때 우릴 찾으려고 노력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때 받은 도움을 되돌려주신다며 텅 비었던 내 통장을 채워주셨다. 잊고 있었다. 살다 보니 너무 오래 지나서 잊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서 돈 빌려가서 떼먹고 야반도주한 괘씸한 지인도 있었던 터라, 그 정도 일은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눈덩이처럼 불어서 마음 쓸쓸하고 기운 빠진 내 앞에 온기로 도달했다.
감사한 마음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시월을 마무리하며 덕분에 조금은 견딜만한 여유가 생겼다. 큰 돈은 아니어도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은 게 이렇게 기분 좋고 든든한 일이라니. 누구에게도 내 형편이 어렵다는 말 하기도 싫고, 이럴 때 연락하면 궁색한 내 상황 때문에 밥 한 번 기분 좋게 사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만나자고 연락하기도 망설여진다. 그래서 더욱 고립되고 혼자인 삶에 갇히는 거다.
나와는 달리, 어떤 사람은 어려울 때 연락하고, 어떤 사람은 살만하면 연락을 끊는다. 어려울 땐 그래도 잠시 내가 말벗이라도 되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살만하니까 연락을 끊는 경우엔 어쩐지 섭섭하다. 어려울 때 손 내밀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려울 땐 주로 혼자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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