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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드라마

by 자 작 나 무 2024. 11. 17.

2024-11-17

 

현실에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설정의 유치한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을 따라 흘러간다.

여자 주인공이 조금 전에 한 대사

"내가 도통 모르겠는 게 있어.

사랑을 하는 게 뭘까?

받는 게 뭘까?

어떤 것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확신하는 걸까?

도저히 모르겠어."

 

이론으로 다양하게 배웠어도 알 수 없는 게 이런 거다. 나도 도통 모르겠다.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더더욱 모르겠다. 처음 사람을 만났어도 어떻게 그다음 친밀한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지, 그런 관계를 유지하거나 이어가는 것이 나에겐 익숙한 일이 아니다.

 

낯가림이 심한 내게 20대에 살던 하숙집은 그 낯가림을 완화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자연스러운 공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보고 직간접적으로 겪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공간. 하숙집에서 나를 겪은 사람 중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략 18명 정도 되는 사람이 늘 함께 살던 그 하숙집에서 6년 남짓 살았다. 한 번도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지 않고, 철마다 옮겨 다니는 하숙생을 한 집에서 겪었다.

 

남에게 해를 끼칠만한 행동이 습관화 된 사람도 아니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것이 일상화된 내 모습을 일관되게 보고 겪은 사람과 대체로 친하게 지냈다. 연애를 할 만큼 서로 호감이 가는 이성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 공간에서도 연애를 할 기회는 없었을 뿐이다.

 

나는 사람을 천천히 보고 관찰하는 편이고, 한두 번의 그럴싸한 언행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일관된 뭔가를 발견해야 사람의 성향을 가름하고 인지한다. 지금과 같이 사회와 동떨어진 생활 속에서 그런 반복되는 과정을 겪을 기회는 앞으로도 없을 거다. 내가 그나마 신뢰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사람을 만나고 익숙해지는 데에 예전과 다른 방법이나 능력을 터득하지 않는 이상에 나는 앞으로 어떤 새로운 사람과도 친밀해지기 어려울 것 같다. 친구나 연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내가 조금 더 변해야 할 모양이다.

 

상대방이 나와 감정적으로 얼마나 친밀하게 느끼는지 알 수 없고, 상대방의 시간이 어느 지점에서 편하게 열릴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대부분 기다린다. 상대방이 나를 찾을 때까지. 친구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바쁘지 않을 때, 내게 연락할 때까지 대부분 기다린다. 특별한 용건이 있을 때 외엔 여태 그렇게 생활하는 게 습관화되었다.

 

내가 심심하고 내가 아쉽다고 불쑥 연락하고 찾아가는 성향이 아니어서 친구들이 나를 찾지 않으면 가만히 멈춰있다. 오늘도 쉬는 날인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말까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통영에 사는 친구들이 쉬는 날엔 정말 쉬어야 할 것이니 내가 그 짧은 휴식에 끼어들어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부터 한다.

 

내가 그 동네까지 달려갔다 올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오늘 오후에 같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자고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오늘 그럴 수 없으니 멈칫하게 된다. 다음 주말에 딸이 시험을 치르고 나면 통영에 다녀와야겠다. 동백식물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들고 실내 식물원 산책도 하고 밀린 수다도 떨고 싶다.

 

나현이네 가족 안부도 궁금하고, 풍화리 친구도 보고 싶고, 창원에 사는 꽃사슴 공주도 보고 싶다. 진주에 가면 삼천포에서 알게 된 두 선생님도 만나고 싶고, 거제에 계시는 강 선생님도 뵙고 싶다. 다들 바쁘신 분이어서 주말 한 번으로는 약속을 다 잡을 수 없을 테니 한 번씩 보려면 수없이 남쪽으로 달리고 또 달려야 할 테다.

 

여기선 만날 수 없는 좋은 사람들이 모두 남쪽에 있으니 내 길은 남쪽으로만 열려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북쪽에 많기는 하겠으나, 내 가슴은 남쪽 바다를 향해 열려있다. 아직은 내 머리가 향수를 이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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