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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4>

250킬로

by 자 작 나 무 2024. 11. 18.

2024-11-18

정이 못내 그립고 고파서 앓다가 겨우 드는 잠도 새벽에 번번이 깬다. 이른 아침에 깨서 실시간 유튜브 뉴스를 틀어놓고 듣다가 다시 잠들어버렸다. 느지막이 깨서 딸과 한 끼 먹으려고 기다리다가 창밖을 보니 하늘이 맑고 밝은 게 그대로 창을 뚫고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물 한 통 싸고 커피 한 잔 내려서 마시고 길을 나섰다. 여름엔가 봄날이었던가 친구 만나면 주려고 사놓은 선물이 아직 방안에 그대로 있어서 신경 쓰이던 참에 그걸 전해준다는 핑계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퇴근시간 맞춰서 도착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길은 멀고, 시간은 예상보다 50분가량 더 걸렸다.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오는 시간이 아무리 짧아도 처음 찍힌 직선거리 운행 시간과 같을 수는 없다.

 

작년 한 해 동안 내게 일관되게 온기와 위로를 준 꽃사슴 공주를 만났다. 큰 눈망울이 너무 맑고 예뻐서 내가 꽃사슴 공주라고 별명을 붙였다. 아이 넷 엄마라고 공주라고 부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목요일에 수능감독하느라 고생하고, 고3인 둘째를 데리고 지원한 대학에 면접 보는데 동행하고 이래저래 힘든 주말이 지난 다음의 첫 월요일이어서 눈은 지쳐 보였다.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내가 불쑥 나타나서 귀한 저녁 시간을 뺏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작년에 내게 준 김장 김치 한 통을 넙죽 받아서 먹고 딱히 돌려준 게 없어서 신경 쓰였다. 과일 한 상자를 사다 주기는 했지만, 그게 그렇게 되갚아지는 게 아니다. 내가 받은 소소한 따뜻한 말과 관심이 작년에 힘든 시기에 나를 살렸다. 만나기 힘든 먼 곳으로 이사하고도 종종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직장 동료였기에 점심시간에 급식소에서 식판 마주하고 밥 같이 먹고, 운동장 한 바퀴 돌면서 몇 마디 주고받은 게 전부였어도 혹은 그 이상이었어도 모두 내겐 넘치도록 감사한 순간이었다.

 

저녁 먹고 카페에 가자는데 더 시간을 뺏기 미안해서 바로 간다고 돌아섰다. 다음에 예고하고 낮에 찾아올 테니 시간 내달라고 말하고 헤어져서 우리에게 또 다음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먼 길 달려가서 잠시 얼굴 보고 밥만 먹고 왔어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엔 과수원집 예쁜 딸, 꽃사슴 공주로 기록해 놓았다. 아직 셋째, 넷째까지 뒷바라지해서 대학 보내려면 한참 멀었긴 하지만, 언젠가 그 시절이 다 가고 우리가 또 연락해서 만날 수 있으면 노년에 함께 여행 다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점심 먹고 오후 늦게 나가서 왕복 500킬로를 운전하고 고향에 다녀온 게 믿어지지 않는, 꿈만 같은 저녁이다.

 

통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둡고 지쳐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돌아올 길이 멀어서 마트에 들러서 반건조 생선 두 팩 사고, 남도에서 한창 나오는 단감 한 봉지에, 그 동네 밭에서 딴 달달한 시금치 한 봉지 떨이로 나온 것 사서 그대로 달려왔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장거리 연애는 못하겠다. 아무리 좋고 그리운 고향도 너무 머니까 오가기 예삿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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