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22
딸이 외출하고 없을 때마다 어쩐지 보너스 받은 기분이다. 함께 있는 건 좋지만, 집에 있어도 제 방에 들어가서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내내 온라인에서 친구들과 대화하고 나에겐 관심 없고 이유도 없이 쌀쌀맞다.
며칠 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짜증 섞인 말투로 내게 말하느냐고 따졌더니 조금 신경 쓰는 것 같긴 하지만, 연애를 시작한 것 같은 딸에게 나는 정말 쓸모없는 존재 같이 느껴진다. 이 지역에서 유일한 친구인데 친구를 뺏긴 기분이어서 그 XY 염색체를 가진 인간이 괘씸하다.
연말정산 하러 전 직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고구마 한 봉지를 사왔다. 눈에 익은 그릇이 어쩐지 너무 눈에 확 띄게 싼 가격표를 붙이고 있어서 뒤집어 보지도 않고, 그림만 보고 두 개 샀다. 그간 오래 써서 종종 금이 가거나 실금이 간 그릇이 있어서 새것을 사야 버릴 수 있을 것 같고, 돈이 없으니 어쩐지 그런 게 더 사고 싶은 거다.
집에 와서 고구마와 달걀을 찌고 한 개씩 맛보듯 먹고 나니 배는 부른데 굴러다니는 대파 한쪽을 보고 라면을 끓였다. 그 대파를 다 썰어 넣어서 시원한 맛은 있어도 무슨 맛에 라면을 먹는지 모르겠다 할 정도로 맛없는 음식이다. 12월에 해결될 줄 알았던 돈 문제가 고소장 접수하고 조사를 받아도 해결되지 않아서 1월 말을 기점으로 다음 달 내 생활은 심정적으로 복잡한 지경에 이르렀다.
못 받고 떼인돈 일부라도 받으면 생활비쯤이야 문제없을 줄 알고, 변호사 비용도 냈고, 노트북도 새로 샀고, 소파도 새로 샀다. 이번 달에 엄청난 카드값을 갚았는데 다음 달에도 새로 산 물건 때문에 갚아야 할 카드빚이 우뚝 기다리고 있다. 계산에 맞지 않는 이런 지출을 한 적도 없었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데 쉰 적도 거의 없었다.
오후에 제주도 친구와 통화하면서 실토했다.
"나 이번달 월세와 관리비 내고 나면 파산이야. 형사 소송 진행 속도가 느려서 아직 돈 못 받았어!"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물려서 다음 달엔 파산하겠다. 내일 마지막으로 장을 보고 한동안 외출을 최대한 줄이고 마트에도 가지 않는 방향으로 전략을 짜야겠다. 이미 저지른 물건은 받아서 쓰고, 후불로 쓴 생활비를 갚는 것부터 시작해서 취업이 이뤄지지 않으면 당분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집이 딸 명의로 계약한 것이어서 월세액이 적지 않은데도 연말정산에 월세액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앞으론 딸이 벌어서 연말정산에 월세액 공제를 받도록 밖으로 내돌리고 싶지만, 그 분야에 경력이 없다 보니 원서 넣어도 오라는 데가 있을지 모르겠다.
통영에 가면 언제든지 편하게 묵을 수 있는 작은 집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친구 집에 재워주기는 하지만, 친구네에 다 신랑이 있어서 내 마음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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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머리가 꽉 막히고 앞길도 막히는 기분이 들 때, 좋은 사람 만나서 취집이라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나이도 아니다. 20~30대라면 이 정도 직장 생활하고 똑같은 일 반복하는 게 지겨워서 시집가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살아버릴까 하는 폭탄 돌려 막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럴 나이가 아니므로.....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든 찾아내서 그냥 취직해서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직장 생활하면 된다.
남자를 만나려고 해 봐도 우선 감정이 기우는 상대를 찾는 게 가장 어렵고, 감정이 기우는 상대를 찾아내도 내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면 경제력이 출중하거나 노후 준비가 된 사람이어서 내가 숟가락만 하나 얻어도 될 정도여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없지.
나이 많고, 마음도 가지 않는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비위 맞추며 사는 건 죽어도 못한다. 그냥 내 힘으로 벌어서 써야지 그런 이상한 취집은 아무리 어려워도 못하겠다.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생각도 시뮬레이션 완성형 'IF'가 성립되지 않는다. 내 힘으로 벌어서 사는 것 외에 다른 복은 없는 거다.
거실에 아직 남은 짐을 조금 더 정리하고 밤엔 최대한 일찍 푹 잠들 수 있게 노력하고, 딸이 놀러 다니느라고 몸 아낀다고 가지 않는 헬스장에 꼬박꼬박 혼자라도 가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온몸이 저린다. 날 추운데 밖에 나갔다 오면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통영에 바다가 보이는 그 사우나에 가서 따뜻한 물에 폭 담그고 온몸에 긴장이 확 풀리면, 바다 보이는 리조트에서 늘어지게 한숨 자고, 그 옆 음악당에서 음악회에서 공연도 보고, 나만의 겨울을 보내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 생각이란 건 꿈과 마찬가지로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실행할 생각 외엔 상상으로 끝날 생각을 하는 건 시시하다.
이달 말까지 잘 놀고 다음 달엔.....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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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서 되물릴 수 있다면, 그때 절망한 상태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투자한 그 일을 하기 전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그 일을 되물리고 싶다. 그 균열을 피하면 다른 일을 선택할 때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처리했을 거다. 이후에 내가 선택한 일은 그 일을 잘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서 조금씩 진심과 정석에서 어긋나게 한 게 많다.
되무를 수 없으니 그 일로 내게 더 피해가 생기지 않게 생각을 달리해야 하는 거다.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하지 말 것이며, 어림도 없는 사람을 만나지 말 것이며, 어림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