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늦게 딸과 함께 마트에 가서 명절 연휴 기간 동안 먹을 식자재를 샀다. 가지 볶음에 맛 들인 딸이 이제 나보다 더 좋아하는 가지 한 봉지, 얼마 전에 사서 맛있게 먹었던 킹스베리, 요구르트 각자 좋아하는 것 한 통씩 따로(나는 무가당 그릭요구르트를 좋아하고, 딸은 달달한 드링킹 요구르트를 좋아한다), 깐 더덕, 마늘 이 정도에 화장지 한 통 사니까 20만 원 정도 나온다. 카트에 별로 담은 게 없이 소소한 식자재 몇 개 샀을 뿐인데 체감 물가가 두 배는 오른 것 같다.
오늘은 아침에 깨서 듣던 뉴스도 듣지 않고 그냥 다시 잠들어서 오후까지 머리가 맑지 않아서 계속 누워있었다. 커피를 마시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시각이지만, 혼자 점심을 맛있게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떠오르는 곡을 찾아서 듣는 이런 시간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창너머로 드는 햇볕이 좋다.
딸은 문지방이 닳도록 약속을 만들어서 자주 나간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단 낫다. 이 지역에서 누군가 지속해서 만날 사람을 찾은 거다.
밖에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햇볕이 좋으니 어디든 나가고 싶다. 어디로 가야 마음이 편할지 몰라서 가만히 방안에 고여 있는 거다. 커피를 마셔도 졸음이 쏟아진다. 그렇게 자고도 깊은 잠을 못 잔 탓인지 눈꺼풀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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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제주도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고 그런다. "이럴 때 아는 사람에게 돈 이야기를 해봐라. 백발백중 다 떨어져 나간다." 이런 걸 조언이랍시고 해준다. 나는 여태 힘들 때마다 입 꾹 다물고 혼자 해결하고 버티려고만 했다. 지금 어려운 건 단지 당장 쓸 돈이 없다는 것 외엔 딱히 어려운 게 없다. 정말 단순하게 돈이 없을 뿐이다.
예전엔 이런 상태로 몸도 아팠고, 아이도 어려서 삶이 까마득했다. 돈도 없으면서 몸도 아프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말은 못 하고 그렇게 아픈 몸으로 며칠씩 굶었던 때도 있었다. 정말 쌀 한 톨 살 돈이 없었다. 지금은 후불로 갚아도 되는 신용카드라도 있으니 그걸로 일단 필요한 건 다 살 수 있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서 벌어서 갚으면 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돈이 말라본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문제가 생긴건 투자라고 생각한 사기를 당한 까닭이다. 이미 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형사 사건으로 조사 중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결과가 나올 거니까 기다리면 된다. 어쩌면 돈은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도 이미 생각해 봤다. 사기꾼이 감옥에 가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단 나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하고 그 일은 마무리하기로 했다.
음력설이 지나면 좀 다른 삶을 살게 될 여지가 있으니 일주일 정도는 편안한 마음으로 잘 쉬어야겠다. 며칠 조용히 고여 있었더니 이제 내 마음이 내 마음 같다.
살림을 맡겨놨더니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신경 쓰지 않는 딸을 보니 내 손이 가지 않으면 집안 어디 하나 말짱할 곳이 없겠다 싶어서 손 놨던 살림도 내 손으로 다 해야 할 모양이다. 어젯밤에 채소 많이 썰어 넣고 달걀말이를 했다. 어릴 때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담아갔던 그런 달걀말이가 먹고 싶었다. 한통 만들어서 반찬통에 담아놓고 나도 모르게 식탁에서 옛날이야기를 했다.
4남매 도시락 싸시던 어머니 손이 아침마다 얼마나 바빴을까. 돼지고기 간 것에 채소를 갖가지 넣고 동그랑땡 만들어서 굽고 케첩까지 곁들여서 도시락 싸가면 친구들이 내 반찬을 부러워했다. 달걀말이엔 항상 알록달록한 채소가 듬뿍 들어서 보기도 좋았고 맛있었다. 내가 음식 하는 걸 어깨너머로 배울 수밖에 없는 생활환경이었다지만, 손맛은 타고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도 그런 걸 타고났는지 대충 만들어도 맛이 척척 나는 걸 보면 신기하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좋았던 기억을 불러내는 달걀말이를 얌전하게 만들어서 맛있게 잘 먹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으니까. 때로는 창너머로 드는 볕이 밝고 따스하듯, 좋은 기억을 품고 겨울을 잘 버티면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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