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켜지 않은지 열흘이 넘었는지 보름이 넘었는지도 모른다. TV가 있는 방엔 정리하지 않은 빨래가 그대로 널려 있고, 새로 사 온 선풍기가 넘어지더니 날개가 부러져서 덜덜거려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그나마 보지 않던 TV를 더 이상은 볼 일이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이가 방학한지 사흘째, 이제는 슬슬 지겨워지는지 어제부터 비디오를 보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컴으로 저장되어 있는 만화들을 보여주면 되는데 그럼 내 자리 뺏기니 그럴 수 없어서 그쪽 방은 더워서 안된다는 말만 핑계처럼 해왔다.
오늘도 급기야 저녁 나들이를 하고 왔음에도 또 조른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방 청소를 시작했다. 반도 못치우고 그대로 졸도할 정도로 며칠 달구어진 방은 온도계가 33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그 더운 방에서 비디오를 보겠다고 우겨서 더우면 다른 핑계대고 오겠지 싶어 방을 대충 정리하고 비디오를 틀어줬다.
걱정이 되어 가보니 여전히 덥다. 환기를 시켜도 이 집은 워낙 오래된 집에다 날림으로 지어 곰팡이 천지에 여름엔 얇은 옥상으로 받은 열이 온실처럼 방안으로 죄다 파고든다. 저녁이 되어도 마찬가지.... 방안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컴 옆에 붙어 있는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어놓고 방문을 열고 저쪽 방까지 냉기가 넘어갈 수 있도록 해놨지만 구조가 워낙 희안하게 되어 있어 어지간해선 저쪽 방으론 냉기가 가지 않는다. 저러다 더위에 지쳐서 잠들 아이를 생각하면 별 일 아니지 싶은데도 괜히 마음이 쓰인다. 항상 빈 자리인 아빠의 자리까지 내가 대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군다던지 다른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사람들 앞에서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유난히 아린다.
마트에서 시장을 봐 올 때마다 아빠랑 쇼핑카트를 타고 도는 아이를 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내 딸 아이의 마음에 본의 아니게 준 상처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이미 지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그리 생각해봐야 별 뾰족한 수 없으니 그저 주어진 현실대로 수긍하고 열심히 살려는 마음 뿐인데. 그래도.. 그래도.... 가끔 이렇게 코끝이 시큰시큰 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아침 저녁 나절만 나던 재채기가 대낮에도 조금 피곤한 느낌이 들거나 찬 음료라도 마시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심하게 난다. 몸이 조금 안좋으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그리고 한편으론 오기가 생긴다. 다시는 내 의사와는 다른 행보를 걷지 않도록 타인이 나를 흔드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혹은 다신 쉽게 당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울.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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