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화실 언니와의 짧은 탈주극의 여파로 아이는 잠들기 전 몇 번씩이나 앞으론 어디 가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하고 또 하며 울먹거리다 잠이 들었다. 겨우 두 시간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엄살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나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는 것이 항상 가슴 아프다.
어제 하루 아이들 공부를 빼먹은 탓에 어제 못한 분량까지 미안한 마음에 채우느라 시간은 물론이요, 목소리까지 높여 수업을 하다 보니 저녁나절이 되어 밥을 잘 먹었는데도 기운이 없다.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일하지 않으면 항상 무언지 불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집 부엌은 입식이 아닌 데다 바닥에 뚫린 하수구에 덮인 거름 장치를 지난해 쥐가 갉아 먹고 아예 뚫고 나와 부엌에서 항상 몇 마리의 쥐가 수시로 달리기를 하곤 했다. 밤엔 무서워서 부엌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쥐 소리에 시달리다 끈끈이를 사다 놓아 몇 마리 잡긴 했지만, 끝이 없다.
하수구를 막는 거름 장치를 사다 끼워놓아도 어찌나 힘이 센지 쇠로 된 것도 들추고 올라오는 바람에 몇 달은 쥐의 만행에 시달려야만 했다. 부엌에 먹을 것이 없을 땐 플라스틱으로 된 그릇들을 갉아 놓거나 담아놓은 물건들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등 도무지 쥐가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들을 해놓곤 해서 가끔은 무섭기도 했다.
결국 쥐 몇 마리를 잡아내고도 대책이 서지 않아 하수구 구멍을 벽돌로 막아놓은 채 살고 있다. 쇠로 된 것을 얹어 놓으면 밤새 그걸 밀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끔찍할 정도로 끽끽거리는 소리로 신경을 긁어놓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이것저것 해보았던 것을 다 치우고 벽돌을 얹어 놓았다.
거기에다 몇 달 전부터 조금씩 마루처럼 만들 수 있는 조립 보드를 사다 깔아놓기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많은 부분의 타일을 가리고 슬리퍼를 신지 않고도 부엌에 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진작 이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사놓을 수 있는 비용이 없었다. 하나둘씩 지금은 불편한 것들을 고칠 수는 없지만 개선해 나가고 있어 사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밖에서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방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치던 통로였던 그곳을 조립 보드를 깔아놓으니 음식을 만드는 동안 아이를 옆에 앉혀 놓고 대화를 하거나 지켜볼 수 있게도 되었고 밥상을 방안으로 차려 들어가서 먹고 들고 부엌으로 나와 하나씩 치워야 하던 것도 이젠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은 변화에도 나는 마음이 찡해진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하나씩 모으고 일구어 나가면서 살림하는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막막했다. 화장실도 밖에 있기 때문에 마당을 거쳐 가야 하는데 어린 딸이 워낙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추운 날 밤에 화장실을 갈 때도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위에 웃옷으로 꽁꽁 싸서 여미고 데리고 갔어야 했던 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갑자기 배가 너무나 아파서 화장실로 뛰어갈라치면 아장아장 걷는 것이 울면서 내복 바람에 맨발로 화장실까지 뛰어오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화가 났고 그것이 보기 싫어 배 아픈 것을 참느라 인상을 쓰고 아이를 업어야 했던.....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퍼할 이유는 없었지만, 사소하지만 혼자서 견뎌내기 힘든 순간들이 너무도 많아서 항상 몸도 마음도 앓으며 지냈던 몇 년을 지나고 돌아보니 물줄기 험한 강을 가로질러 건너온 기분이 든다.
아직 이 불편한 환경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제 아이도 그때보다 많이 자랐고 잠시 떨어져서 혼자 TV를 보거나 놀기도 한다. 그건 내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고 어제처럼 평소에 아이가 좋아하고 따르는 주인아주머니가 저녁도 챙겨주고 같이 놀아주었는데도 그렇게 엄마를 애타게 찾고 울기만 했던 것으로 보아 아직은 멀었다.
이렇게 생활이 변하기 전 내 방엔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있었고, 책장엔 책이 가득했고 취업과 결혼 등으로 집을 비운 형제들 덕분에 방 네 개를 혼자 차지하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부족한 것 없이 지냈다. 마당에 나서면 향기로운 화초와 나무들이 있었던 넓은 집과 명절마다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가족들 모두를 한꺼번에 다 잃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종류의 온갖 고생을 자초하며 얻은 딸 아이 하나.
그래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누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를 간섭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곧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제 그 누구의 뜻도 아닌 내 생각대로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 만큼 책임감에 마음은 무겁지만 홀가분하고 행복하다.
글을 쓰는 동안 아이는 등 뒤에 의자를 놓고서 촘촘한 빗으로 내 머리를 열심히 빗겨주고 있다. 인형 머리 빗기듯이 열심히 빗겨서 예쁜 방울로 묶어준다. 항상 내 몸과 마음을 그렇게 칭칭 동여매고 나를 불편하게 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도 그저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는 네가 있어서 이 엄마는 참 행복하다..... 내 딸아.’
'흐르는 섬 <2003~2009> > <2004>'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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