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섬 <2003~2009>175 환골탈태 2003. 9. 14 그렇게 해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방안까지 밀고 들어올 것이라는 것도, 지금 내가 이렇게 복잡하게 꼬인 생을 살게 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계절이 아닌 때에 피는 꽃이 없듯이 때를 기다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이치처럼 인생의 꽃도 그러할 것이라 믿어왔고, 힘든 일을 겪을 때도 지금이 이 노선을 지나쳐야 할 때여서 그럴 것이라 여겨왔다. 그 고통이 극심하거나 나 아닌 타인에게까지 파급효과를 미칠 때 느끼는 통증을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을 따름이다. 매미가 성충이 되어 한여름을 울기 위해 4~6년을 땅속에서 유충 상태로 지낸 후 번데기가 되었다가 다시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는 변태기를 거치고 그다음에야 다시 껍질을 벗고 .. 2003. 9. 14. 돌아갈 수 없는 길 2003. 8. 20 어릴 적 살던 집은 마당이 넓었다. 몇 그루 큰 나무와 계절마다 바뀌어 꽃피는 화초들이 자라던 마당과 오래된 담쟁이 넝쿨로 여름이면 푸르렀던 바닷가 외진 곳에 있던 그 집은 도로 확장공사를 이유로 스무 살이 넘어서야 헐려졌다. 바깥으로 놀러 나가지 않을 땐 마당에서 밖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놀이를 다 할 수 있었다. 늘 쓰다듬어줄 강아지가 한두 마리쯤은 있었고 심심할 때마다 마당에 나가면 무엇인가는 볼거리가 있어 좋았던 그 공간을 어머니가 아파트로 이사하시면서부터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자라던 집이 없어졌다는 게 너무 싫어서 처음 이사하고 몇 년간은 그 근처를 일부러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늘 행복한 기억만 있었던 유년은 아니었지만 파란 담쟁이 넝쿨에 섞여 끊임없이 피는 것 같았던.. 2003. 8. 20. Why Worry 2003. 8. 19 6년간 한 주인이 해주는 하숙 밥을 먹었다. 한 번 무언가 정하면 적응하여 맞추어 가도록 노력한다. 자기 집이 아닌 바에 남의 집에서 살기에 남이 해주는 밥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란 생각에 정들면 내 집이리라 여겨서였다. 그 하숙집은 할머니 두 분이 함께 음식 준비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한 분인데 할머니는 두 분이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하숙집 선배들이 곧 그 할머니 두 분의 관계가 소위 first와 second의 관계라는 것을 킥킥거리며 일러주었다. 연세가 제법 드셨는데도 두 분은 겉보기만큼이나 생각이 다르신지 가끔 티격태격에 토라지시기도 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두 할머니를 거느리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은 나도 속으로 웃었지만 정작 .. 2003. 8. 19. 사랑의 상처 부게로 * 흐르는 곡 : Y Una Madre - Savina Yannatou 2003. 8. 17. 몸에 난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 아물어지면 통증은 대체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마음의 상처들은 잊히기도 어렵거니와 잊은 듯하였다가도 만성질환처럼 나를 괴롭히곤 한다. 사소한 것에도 쉽게 상처받는 예민한 성격이어서 다소 방어적이고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무언가 그럴싸한 이유를 덧대어 감정적으로 부딪힐 만한 사람들은 비껴가도록 애써왔다. 그렇지 못한 경우 과감히 부딪혀 있는 대로 받아들였을 땐,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었던 것이 지금의 비뚤어지고 모난 나를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내릴 수가 없다. 사람에 대해 뚜렷이 정의 내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막연히 생각하는 것들에 대.. 2003. 8. 17. 느티나무 아래에서 2003. 8. 13 해가 어스름하게 질 무렵 바닷가 벤치에 앉아 물결처럼 무심히 흘러가는 청춘을 생각했다. 멀리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제법 속도를 내서 달리는 차 안에서 아이는 잠이 들고 나는 그 어둠 속을 무작정 달리는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언니는 자꾸만 추월하는 친구를 나무랐지만 그렇게 하는 게 도무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난 신경이 무뎌져 있었고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해주기를 바랐다. 회를 잔뜩 먹고 술도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느티나무 아래 테이블을 얌전하게 놓은 그 달빛이 은근히 비쳐드는 산장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마침 오늘이 음력 보름이라 달이 밝았다. 구름이 엷게 달빛을 가렸다가 조금씩 흩어지는 모양을 보는 것조차 달달하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가지 사이로 보이.. 2003. 8. 13. 운명의 여신이여 2003. 8. 13 한동안 다양한 장르를 고루 들어보려고 정리해놓은 음악 파일 일부를 선곡해서 기분에 따라 들을 수 있도록 해놓고 그것을 거의 반복적으로 들어왔다. 자주 들어가던 세이캐스트 음악 방의 반복적 선곡에 싫증을 느낀 후론 늘 내가 듣고 싶은 충동이 이는 곡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듣는다. 며칠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조율할 음악을 찾지 못하다 언젠가 폭발하듯 강렬할 도입부를 가진 음악을 찾다 사다 놓은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꺼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처럼 합창이 들어간 부분이 있는 곡이다. 레퀴엠을 듣다 감정이 수그러들었다 다시 격앙된 순간 불같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채워줄 만한 곡으로 달리 손에 잡히는 곡이 없어서였다. 볼륨을 제법 높여놓고 창을 닫았다. 제1 서곡은 가슴을 쿵쿵 치는.. 2003. 8. 13.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 지난 글을 옮기다 보니 참 새삼스럽다. 저런 생각을 했던가? 도대체 누구를 언급한 것인지 기억하려야 할 수가 없다. 2003. 8. 8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 화양연화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언제일까..... 영화를 보다가 영화 속에 나오는 음악에 매료되어 영화를 보고 난 후 음악이 수록된 음반을 구하여 듣는 일은 있었지만, 음악을 먼저 듣고 그 음악에 이끌려 영화를 보게 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선물 받은 CD에 들었던 곡 중에 유난히 내 감성을 자극하던 첼로 연주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언젠가 보다가 끝까지 보지 못하고 덮었던 영화 '화양연화'를 인터넷 상영관에서 뒤져서 피곤한 눈을 비벼가며 다 보고야 말았다. 저 음악 같은 느낌이 드는 영화인지 궁금해서였다. 이 미묘한 느낌의 연주곡. 애달프고.. 2003. 8. 8. 간장떡볶이 2003. 7. 19 주말이다. 요일이나 날짜에 무감각하게 사는 까닭에 주말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느낌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하루가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면 어김없이 주말이다. 동네 마트에 나가보면 유난히 사람이 많고 가족끼리 시장을 보러 온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 신경쓰지 않고 무감각하게 지낼 때 느끼지 못하든 쓸쓸함이 그렇게 사람 많은 장소에 가면 느껴진다. 주말 우울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힘이 빠진다. 일부러 빨래 모아둔 것을 주말에 하고 평소에 대충대충 하던 청소도 주말을 끼고 대청소를 한답시고 일을 만들어보아도 역시 그 이상한 우울증은 간헐적으로 나를 흔들어 놓는다. 아이 손을 잡고 바닷가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여느 때와는 달리 더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뭘.. 2003. 7. 19. 진달래꽃 2003. 7. 14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하고 나선 걸음에 그녀의 차 안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 낯익은 가사, 가슴을 쿵 치는 듯한 노래 소월의 시를 가사로 삼은 '마야'라는 가수의 진달래꽃. 그녀의 허스키하면서도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 노래가 멍하게 정지되어 있던 머리를 흔들어놓았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바닷가 한적한 곳을 드라이브하고 우연히 듣게 된 어느 중학교 교사의 자질 문제를 왈가왈부하는 열띤 대화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때 같았으면 그 문제성 있는 교사와 학생들 간의 문제를 꼬집어 비트는 글을 써서 전교조 사이트나 그 학교 사이트에 올렸을 텐데, 이미 오래전 내 머리로 잔잔하고 평범.. 2003. 7. 14. 거울 앞에서 2003. 7. 8 사춘기 때 여드름으로 덮인 내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거울 보는 걸 무척 꺼렸다. 그 생각이 대학생에 되어도 이어지는 바람에 여성으로 태어나 불리한 외적 조건 때문에 받는 불이익에 관한 생각과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모습으로 차등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적잖았다. 부딪혀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먼저 열등감에 빠졌고 포기하는 무기력함을 보였다.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과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것이 있음으로 후천적인 노력만으로 성취할 수 없는 종류의 일에 대한 열등감은 좌절감까지 덤으로 안겼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차라리 욕심내지 않고 포기하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면서 그런 상황이 반복되진 않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던 시기엔 외모에 .. 2003. 7. 8. 백수의 하루 구인 광고가 가득한 신문을 몇 부 가져다 놓고 새벽녘 아이가 잠든 사이 눈이 빠지도록 샅샅이 들여다보다 이럭저럭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래도 다 뒤지기 전까진 희망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에 초조함이 덜했는데 막상 다 뒤지고 나니 기운이 죽 빠진다. 홀 서빙, 유흥 음식점 등에선 30대 아줌마들도 더러 써준다는데, 아무래도 체질에 맞지 않는 곳이라 그걸 접고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뒤적뒤적해보니 지난번에 면접 보러 갔었던 학습지 교사나 학원강사, 경리..... 그런 것들이다. 학습지 교사는 며칠씩 정기적으로 연수를 받아야 한다기에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찮아서 면접 보고 몇 번씩 오라는 전화를 받고도 그냥 덮어버린 곳이고, 더구나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카드사에서 내 급여를 거의 다 압류할 것이라 열.. 2003. 6. 12. 흐르는 섬 이틀 연이어 내린 봄비를 핑계로 방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고 오후 늦게 구름 걷히는 것을 보고서야 산책을 나섰다. 어디로 갈지 모르면서 그냥 아이랑 손잡고 집을 나섰다. 골목을 나서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 다리 하나를 끼고 바다 너머는 육지, 여긴 운하를 낀 섬이다. 내가 사는 곳만 섬인 것이 아니다. 나 또한 어쩌면 섬 같다. 누구든 쉽게 다가올 수 없도록 혼자 사방에 바다를 끼고 오뚝 앉은 섬 하나. 그게 내 모습 같다. 며칠 사이 한산도, 욕지도 두 섬에 다녀왔다. 섬에 살면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는 게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내가 사는 섬엔 다리가 있으니 배를 타지 않아도 언제든 뭍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처럼 인터넷은 세상으로 나를 이어주는 연륙교 같은 것이다. 전원을 켤 때마다 눈을 뜨.. 2003. 5. 31. 그녀의 화실 그녀의 화실은 노천카페처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른 아침을 먹고 혼자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꽤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아침 기분을 느껴본다. 언젠가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길 버스에 오르던 생각이며 이맘때쯤 스승의 날, 일찍 수업을 마치고 거리를 배회하던 기억이 짧은 단막극처럼 떠오른다. 그녀의 차를 타고 법원 근처 한적한 길을 드라이브 하면서나, 근사한 점심을 먹고 화실에 앉아 온종일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주홍빛 베고니아 화분 너머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나는 어쩌면 멈춰진 시간 속에 박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느낀 지 오래다. 창 너머로 종일 이상한 기운이 넘나들었다. 비 올 듯 흐린 하늘 찌뿌둥한 .. 2003. 5. 14. 이전 1 ···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