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5
일요일 오후, 객이 다 빠져나가서 한산해질 시각에 저 자리에서 햇볕 받으며 물 드는 소리를 듣는 게 좋다. 바닷가 산책길을 걸으며 뭍을 향해 물 드는 소리 듣는 것도 좋지만, 해가 짧아질 무렵에 접어드니 일요일 오후에 걷는 것은 기운 빠진다.
지난 일요일에도 바다를 향해 열린 테라스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벤치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책장을 넘겼다. 오늘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서 볕만 쬐기로 했다.
지난주에 덮은 그 책만큼 내 갈증을 채워줄 책을 아직 찾지 못했다.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메시지와 에너지를 읽는 내 취향에 그보다 더 적절한 게 있었던가 싶을 만큼 깊은 공감과 감동이 그대로 속에서 찰랑거린다.
언덕에 선 나무는 열렬히 한 곳을 향해 뻗어나간다. 잠시 숨만 고르고 오늘은 일찍 돌아서기로 했다.
등 돌리고 섰던 자리를 돌아보니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곁을 지키는 고양이가 눈에 띈다. 말 한마디 걸고 지나치려니 어미가 내게 구조 신호를 보낸다. 이번엔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 애원하는 소리다. 차 안에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마트에서 산 시금치 한 단에 고구마 한 봉지, 떡 한 팩이 전부여서 줄 게 없다.
떡을 종이컵에 옮기고 떡 포장했던 그릇에 물을 부어주니 어미가 그 물을 먹는다. 떡에 묻었던 콩고물을 그 옆에 슬쩍 놓았더니 그것도 먹어본다. 어지간히 굶었나 보다. 영역 동물이어서 그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침 음식 쓰레기든 뭐든 말끔하게 정리한 쓰레기 처리 구역에서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미가 내게 낸 소리가 가늘고 처량하다. 물을 주러 다가가니 도망갈 기력도 없는지 웅크린 새끼 목을 문다. 여차하면 새끼 들고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거다. 그 정도 가까이 다가서면 한참 줄행랑을 치는 게 고양인데 그럴 기운도 없는 거다.
전에 샀다가 남긴 츄르를 어디에 뒀는지 딸에게 문자로 물어보니 차에 넣지는 않고 어디 다른 곳에 두었다고 알려준다. 혹시 트렁크 어디 가방에라도 넣었으면 찾아서 먹일 참이었다. 새끼 고양이 사진을 찍어서 보냈더니 저도 신경이 쓰이는지 편의점에 가보면 먹이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딸이 거든다. 편의점엔 고양이 줄 것이 없다.
동네 마트에 갔다가 몇 가지 장바구니에 담고, 집에 들러서 먹이를 옮겨줄 그릇 챙기느라 조금 지체했더니 그 자리에 없다.
어쩌나 하고 고개를 돌리니 비를 피해서 새끼와 어미 냥이가 나무 아래에 앉았다. 가만히 보니까 지난주에도 내가 앉아서 놀던 그 테라스 근처에서 사는 고양이다. 간혹 지나는 사람 외엔 그다지 오가는 이도 없는 한산한 길목이어서 길손에게 얻어먹을 기회도 없었던 모양이다. 새를 한 마리 잡아서 찢어놨다. 그다지 먹을 게 없었던 모양이다.
새끼 낳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걸음도 뒤똥뒤똥 까불까불 노는 냐옹이는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어미는 움직임이 느리고 몸집이 나온 지 몇 달 되지 않은 새끼 고양이 마냥 작고 말랐다. 새를 잡아서라도 저도 먹고 새끼도 먹일 기세였어도 배는 곯았던지 내가 가까이 가도 가만히 먹이 주는 손을 보고 있다.
어미는 한참 동안 먹고 또 먹었다. 새끼는 먹이를 조금 먹고 기운이 나는지 그제야 까불거리며 논다.
데크 아래 비를 피할 수 있는 자리에 먹이통을 옮겨놓고 왔다. 해지기 전에 여기 올 수 있는 날엔 냥이 둘이 잘 있는지 보러 한 번씩 다녀가야겠다.
*
호르몬의 작용으로 넘을 수 없는 본능을 겹겹이 갑옷처럼 입은 어미 고양이에 연민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도 그랬어. 너처럼. 새끼가 혼자 먹이를 구해서 먹고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라도 버텨라.
11월 5일이 이렇게 봄날처럼 따뜻한 적 있었던가? 한참 가물었고, 이상하게 낮엔 더웠다. 오랜만에 비 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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