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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4>43

편식 2004/10/04 02:23 관념일 뿐인 관념과 정신의 영역에 자리만 차지하는 괴물 같은 지식을 탑재하는 항구에는 정박하고 싶지 않다. 멀리서 불빛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것이 깊은 뿌리 없는 잔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면 쉽게 떠난다. 사람들이 매료되는 여러 종류의 지적 부유물 중에 가끔은 겉멋에 취한 발림도 있다. 내가 피울 수 없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가끔 묘한 눈빛으로 허공을 한 번씩 주시하던 혹자의 반항기 섞인 시선을 멋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나와는 다른 색채를 가진 사람의 향기를 쫓아 넋 나간 듯 쳐다보다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감추려 애썼던 적이 있었다. 정체성 없는 껍데기 지식인의 유창함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어도 현혹할 수는 있다. 문학이라는 이름을 내세우.. 2018. 8. 29.
꿈을 부는 아이 2004년 9월 9일 23:33 우리 집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도로를 끼고 놀이터가 있고 놀이터 앞은 바닷가. 집 앞엔 저렇게 밭이 있다. 낡고 불편한 집에서 이사를 나가지 못하는 많은 이유 중에 내 형편에 더 좋은 집 찾아 이사하기 어렵다는 것은 제외하고 이런 환경이 드물다는 것이다. 언제든 보고 싶으면 바다를 볼 수 있다. 옥상에 올라가도 볼 수 있고, 골목만 빠져나가면 바다가 보인다. 어릴 때 내가 자라던 집은 마당이 넓어서 갖가지 나무가 있었다. 겨울엔 마당에 있는 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아놓고 즐거워했었고 봄이며 여름이면 파랗게 온통 벽을 덮고 자라던 담쟁이며, 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피던 딸기 냄새나는 덩굴장미의 빨간 미소로 한없이 행복했던 담장 옆 대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내.. 2018. 7. 26.
갈치구이 쌀뜨물로 구수하게 시래깃국을 끓여놓고 사 온 갈치 중에 굵은 것만 골라서 몇 토막 굽는다. 갈치 굽는 냄새가 좁은 집안에서 진동하다 열린 창 너머로 마당까지 넘어간다. 갈치를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들뜨고 좋은지 모르겠다. 며칠쯤은 식단에 신경을 못 쓰고 대충 먹이다 뭔가 신경 써서 음식을 할 때 기분이 꼭 이렇다. 엊그제 싱싱한 고등어를 사다가 찌개 끓여서 맛있게 잘 먹고 한 그릇 아직 남았는데 데워서 먹을 생각 않고 새로 입맛 돋울 음식을 마련하는 내 꼼꼼하지 못한 살림 솜씨는 누가 흉볼 사람 없으니 괜찮다. 데워 내놓으면 한 때 맛있게 먹은 걸 다시 맛있게 먹진 않는 아이라서 신경이 쓰인다. 매번 끼니때마다 다른 반찬을 해주진 않지만, 오늘은 산에도 다녀오고 바람 쐬고 돌아오는 길.. 2004. 11. 7.
변방의 푸른 바다, 비극을 잉태하다. 뜨거운 물로 지친 몸을 달래고 있다. 생활 리듬을 무참하게 깬 피곤한 내 행동이 결국 몸에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지독한 감기를 앓을 예정이다. 어제부터 불편해진 몸이 드디어 반란을 시작했으므로. 어떤 일이든 원인 없이 결과가 주어지는 경우는 희박하다. 가끔 우연의 소치도 있지만,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결과를 겪으면서도 불평한다. 원인 제공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무심결에 스쳐 지나버렸거나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기를 앓게 된 원인을 충분히 제공했으니 몸이 아파도 할 말이 없다. 그동안 잘못한 것을 반성하며 알뜰히 내 몸을 챙겨야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물을 끓여서 발을 담그고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고 찬 기운이 조금은 잦아든 느낌이 든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 2004. 11. 4.
마음이 나드는 자리 "선생님은 왜 맨날 그 잔에만 커피를 마시세요?" 우리 집에 공부하러 오는 아이 하나가 그렇게 불쑥 물어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유리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는데 매번 그 잔만 찾아서 마시고 있다. 아이들 보기엔 썩 예쁜 잔도 아닌데 매번 그 잔에만 마시는 게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응.. 나는 이 잔이 제일 좋아." 그 잔이 제일 좋은 이유는 제일 예쁜 잔이어서도 아니고 제일 큰 잔이어서도 아니다. 커피를 머그잔에 그득 부어 마시니 예쁜 커피잔은 있어도 거의 꺼내 쓰질 않는다. 손에 익은 이 머그잔은 커피를 부어 마시기 시작하면서 이젠 커피색이 배일 정도로 많은 커피가 담겼었고 내 손에 익어서 다른 예쁜 잔이 있어도 쉽게 거기에만 손이 간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자기에게 익숙해지고 정들면 쉽게 버리지 못하는.. 2004. 11. 4.
공연히 찍어본 셀카 콧물, 재채기의 계절인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탓인지 쉴 새 없이 재채기를 하다 보니 코끝이 빨개지고 지친다. 수요일은 일이 조금 빨리 마치는 날이라 낮달 언니 화실에 잠시 들렀더니 신형 디카폰을 샀다고 꺼내서 보여주셨다. 시험 삼아 사진을 찍어보니 대단한 고화질 핸드폰은 아니라는데 엊그제 찍어본 동생의 카메라폰과는 차이가 엄청나게 났다. 잠을 잘 못 자서 눈은 퀭하고 부스스하다. 아이처럼 처음 만져본 디카폰을 잡고 요리조리 만져보다 카메라 성능 테스트한다는 핑계로 내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얼굴에 주름살 생기는 건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갈수록 나이 든 티 나는 내 모습이 가끔은 몹시 서글퍼진다. 나이만 먹고 일없이 사는 내 가볍고 허퉁한 삶이 그림자처럼 얼굴에 드리워.. 2004. 11. 3.
편지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는 밤이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서 문이 잠겼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잠들기 전에 지영이가 나에게 편지를 썼다. 자꾸만 말을 시켜서 종이 한 장을 주고 내게 하고픈 말이 있으면 뭐든 써보라고 했다. 다섯 살짜리가 글 배워서 무슨 말이든 편지로 쓸 수 있다는 게 예뻐서 마냥 흐뭇해진다.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는 내 등 뒤에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빗으로 계속 내 머리를 빗겨주고 면봉으로 귀도 닦아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란 걸 아는지 오늘은 말도 없이 시큰둥하게 있는 엄마를 위해 풀서비스를 해준다. 편지 쓴 종이를 펴놓고 나는 괜히 혼자 마음이 찡해진다. 코끝도 찡해진다. "어린이집에서 골고루 먹습니다. (집에선 좋아하는 것만 먹는데...다행...) 친구를 안 괴롭힙니다. (.. 2004. 11. 1.
나의 짝사랑 블로그 카키 님이 '대체 누구지.....'라고 남긴 댓글 밑에 결국 손가락이 근질거려서 들통 내고 말았지만 난 그 블로그에만 가면 괜히 가슴이 뛴다.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면서도 그 사람이 만든 포스트를 보면서 이질감도 느끼지만, 괜히 설렌다. 때론 가슴에 잔잔한 물결처럼 미묘한 전율도 느낀다. 그 블로그는 다른 별에서 온 왕자님이랑 솜사탕 먹으며 동화 나라에서 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쓱 들여다보고 오곤 한다. 현실적인 생각들을 굳이 동원해서 사람을 분석하고 판단할 필요까지 느끼진 못하기 때문에 한 곳이라도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는 것이 그냥 좋은 것이다. 되도록 이런 환상을 깨지 않고 오래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 실제로 그 블로그 주인을 만나서 이야기하거나 하는 것 자체는 상상해보지 않았다. 그냥 지.. 2004. 10. 24.
그 과자 어디서 샀어요? 으헉 황당한 거.... 이 꼬맹이들 내 과자에 눈독 들이고 있잖아~ 화실 문을 열어놓고 한 시간 남짓 심심할까 봐 블로깅 하면서 커피랑 먹으려고 산 비스킷을 이 화실의 깜찍이 자매 민주와 민영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나도 야금야금 먹고 있는데, 이 꼬맹이 둘이 내가 있는 자리에 교대로 두 번, 세 번씩 와서 말을 시키고 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몰랐지만 두 번째 올 때 책상 위에 올려진 내 비스킷 봉지를 힘주어 쳐다보는 것을 보고 눈치챘지만,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따고 능청스레 하는 말에만 대답하고 커피만 마셨더니, 녀석들 세 번째 와서는 "이 과자 어디서 사셨어요?" 그리고 구구절절 과자 타령인데 이미 낮달 언니에게 그 녀석들의 깜찍하고 다소 엽기적인 습성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더 시치.. 2004. 10. 8.
한적한 시골길로 달리는 노선의 시내버스를 타고 벼가 노랗게 익은 논 사이로 열린 길을 걸어 찻집을 찾았다. 유혹하듯 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내 뜨거운 가슴이 새삼스레 잠시 웃음 짓게 만드는 오후였다. 이대로 낡고 정든 신도 벗고 길 따라 무작정 그저 걸어가고만 싶은 가을 길..... 황금빛 갈기 사이로 상처를 숨기고 또박또박 걸음을 내딛는 상상 속의 동물이나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한 한때는 신의 일족이었을지도 모를 의문의 존재가 되어 가을 길을 걷고 있는 긴 그림자. 나의 상상은 버스가 나를 내려준 허퉁한 길가에서 사뭇 멀리 떨어진 인가로 접어드는 들길이며 좁은 동네 길을 접어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늘하늘 긴 머리카락 하오의 햇살을 받으며 반사되는 빛으로 잠깐.. 2004. 9. 30.
외로움 그리움이 시가 되어 동심초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 2004. 8. 27.
가을인가..... 날씨는 아직 덥지만 이미 가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마음이 이유도 없이 설레고, 그립고 아프고 바람에 팔랑거리는 낙엽처럼 이내 스러지고, 하늘하늘 아지랑이일 듯 야릇한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리 없다.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어지럽고 마음도 산란한데 내일까지는 잘 버텨야 주말이다. 다음 주 중으로 방학이 끝나면 오전에 움직일 일은 없어지겠지만 방학이 끝나면 여기 오던 아이들도 줄어들게 된다. 집이 외진 곳에 있어 학교 마치고 차편 없이 아이들을 보내기엔 아마도 신경 쓰이는 곳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시 들렀던 화실에서 언니도 가을을 타는지 심란해 죽겠다는 말과 함께 어디로 훌쩍 가버리고 싶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툴툴거리시는 걸 보고 어찌 나랑 증세가 비슷하신가 했다. 가을을 타는.. 2004. 8. 26.
작은 행복 어제 화실 언니와의 짧은 탈주극의 여파로 아이는 잠들기 전 몇 번씩이나 앞으론 어디 가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하고 또 하며 울먹거리다 잠이 들었다. 겨우 두 시간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엄살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나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는 것이 항상 가슴 아프다. 어제 하루 아이들 공부를 빼먹은 탓에 어제 못한 분량까지 미안한 마음에 채우느라 시간은 물론이요, 목소리까지 높여 수업을 하다 보니 저녁나절이 되어 밥을 잘 먹었는데도 기운이 없다.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일하지 않으면 항상 무언지 불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집 부엌은 입식이 아닌 데다 바닥에 뚫린 하수구에 덮인 거름 장치를 지난해 쥐가 갉아 먹고 아예 뚫고 나와 부엌에서 항상 몇 마리의 쥐가 수시로 달리기를 하.. 2004. 8. 25.
이상한 냄새 - 레이저 수술 후기 어제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보고 병원에 가는 것에 겁먹어서 도무지 혼자 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사실 아파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만 사람의 심리적인 부담감이란 게 별 것도 아닌 일에 긴장하게도 만드니 레이저 수술이라 크게 아플 것 같지도 않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는지라 결국 오늘부터 휴가를 즐.. 2004. 8. 2.
무슨 생각이 드세요? 이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너무나 평온함을 느꼈다. 약간은 습기가 느껴지는 시원한 땅 속에 누워 위로 뚫린 하늘을 보는 기분이 한편으로 끔찍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 죽음은 그다지 거부감 느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할 일을 다 마치고 저기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심경을 경험해본다는 것은 .. 2004. 7. 31.
여름날 추억 만들기 초복이었을 때도 초복인 줄 모르고 지났는데, 오늘 또 중복인 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그다지 절기를 챙기지 않는 편이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그렇게 지내다 보면 모든 날이 그날이 그날 같아지는 게 싫으니 가끔은 안챙기던 것도 챙기고 기분삼아 생색도 내 볼 일이다.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삼계탕.. 2004. 7. 31.
블로그 산책 '언제 한번' 이란 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일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나서, 보고 싶어서,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바로 지금 지금 연락하세요. 언제든 당신을 반겨줄 친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지나면 언제 한번 이라는 단어 속에 그 사람은 기억속으로 묻힐 것입니다. 우울할 때 나는 블로깅을 한다. 산책하듯, 조깅하듯 랜덤 버튼을 타고 마구 블로그를 여기저기 쏘다닌다. 그러다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는 것, 귀에 들어오는 것들을 접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조금은 풀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좀 전 어떤 블로그에서 발견한 걸 그대로 복사해왔다. 나도 저런 말을 싫어한다. '언제... *** 해야죠.' 이건 빈말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듣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2004. 7. 29.
어떤 우울 TV를 켜지 않은지 열흘이 넘었는지 보름이 넘었는지도 모른다. TV가 있는 방엔 정리하지 않은 빨래가 그대로 널려 있고, 새로 사 온 선풍기가 넘어지더니 날개가 부러져서 덜덜거려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그나마 보지 않던 TV를 더 이상은 볼 일이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이가 방학한지 사흘.. 2004. 7. 29.